고새 식빵 전문가라도 된 거야?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저녁 식사를 마친 남편이 말했다.
"무슨 일 있어? 잠시만 "
순간 나는 걱정이 앞섰다. 남편은 크루아상 전문점을 그만둔 후 한 달 반 만에 식빵 전문점에 출근했다. 첫 출근을 하고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점심 식대 십만 원 준다는 걸 차를 가지고 다닐 거라 주유비 오만 원만 달라고 했던 남편에게 씩씩댔던 생각이 났다. 남편의 논리는 같이 일하는 팀장이 2시까지 점심시간 없이 쉬지 않고 일하니 보조하는 자기가 혼자 밥 먹으러 나갈 수 없다는 것. 주유비는 어차피 들어갈 거니까 필요한 만큼 달라고 했다. 뭐 이렇다. 제대로 된 월급을 손에 쥐어본 적 없는 사람이 주겠다는 식대를 반이나 깎고 필요한 만큼만 받겠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오만 원에 남편을 현실 감각이 제로인 사람이라 혼자 구시렁거리던 기억. 오만 원을 오억으로 갚겠다던 남편의 말. 세 번째 빵집에서 일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첫 월급이 통장에 찍힌 날 남편의 손을 잡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수고했다며 기뻐했다. 이대로 안정적인 생활은 힘든 걸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소파에 있는 남편 곁에 앉았다.
"여기 식빵 전문점에 다닌 지 벌써 반년이 지났어 다양한 빵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다른데 알아보는 중이야"
" 고새 식빵 전문가라도 된 거야? 빵은 어떤지 모르지만 직장도 3년은 일을 해야 돌아가는 게 보이고 자신감이 생겨서 이직 생각이 들잖아. "
" 물론 그렇긴 한데 여기 빵집은 일찍 가고 퇴근이 이른 건 좋은데 식빵 종류도 몇 가지 안되고 다른 메뉴는 스콘 정도라 단순하기도 해. 무엇보다 아침 일찍 시작해서 11시쯤 반죽 마치고 베이킹하는데 자리를 비우지 못할 만큼 바빠서 집중해야 해. 어떨 땐 오븐을 지켜보느라 화장실도 못가."
" 아니 생리적인 욕구를 참으면 어떻게 해. 말하고 다녀와야지. 몸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이렇게 얘기하면 자기가 이해하기 쉽겠다.. 그러니까 내가 이직을 하려는 이유 세 가지!"
"그래 어디 들어보자"
" 첫째, 근무시간이 쉼 없이 굴러가는 거야, 새벽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팀장이랑 나랑 딱 둘이서 성형하고 굽고 때에 따라서는 캐셔하시는 분이 출근하는 10시 전에 판매도 해야 돼. 그 중간에 쉬는 시간이라고는 성형을 마친 11시경. 잠깐 팀장이랑 빵과 커피 한 잔으로 요기해. 그리고 다시 작업에 들어가면 서로 말할 틈도 없이 손발을 움직여. 타이트하게 움직이다 보니 생리적인 욕구를 참아야 할 때가 많아. 일단 식사시간이 불규칙해지지. 생체리듬이 조금씩 무너지는 느낌이야. 몸이 예전 같지 않아."
" 둘째, 둘이서 하고 프랜차이즈다 보니 새로운 빵을 만들어볼 기회가 없어. 주어지는 레시피대로 성형하고 사이즈도 규정대로 해야 해. 식빵 한 가지로 베리에이션 메뉴를 만들어보는 장점은 있지만 어차피 다 식빵이지 뭐. 다른 메뉴라고는 스콘이 다야"
" 셋째, 주방 환경이 열악해. 둘이서 작업하기에 비좁아. 작업 동선으로 치자면 나쁘지는 않지만.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아파트 상가인데도 어딘지 부족해. 지난여름에도 에어컨 고장 나서 며칠 고생했잖아. 그때 정말 체력적으로 힘들더라"
"무슨 얘긴지 알겠어. 다양한 빵 경험이 필요하다는 거, 점심시간 없이 근무시간이 굴러가는 열악한 근무 환경. 그건 우리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아. 단 한 가지. 나도 생체리듬이 깨지는 건 개선이 필요하다 생각해. 내가 자기라면 솔직히 얘기할 거 같아. 사장이든 팀장한테든 볼일 보고 오겠다고 잠시 오븐이나 판매 부탁드린다고 말이야. 아니 사람이 하는 일인데 왜 그런 말도 못 해?"
"자기가 몰라서 그래. 서로의 일에 열중해 있으면 그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아"
" 잘 모르겠다. 말해보고 아니면 마는 거지. 자기가 불편하다는 걸 표현해야지. 안 그래?"
다니던 빵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한 달이 채 못되어 남편은 빵집을 그만두었다.
쉬는 동안 남편은 미뤘던 건강검진을 했다. 원래 안 좋았던 대장에 이상신호가 생겨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남편은 회사에서도 계속되는 과로로 비슷한 증상이 생겨 검사 후 몇 달간 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 그때와 비슷했지만 남편의 몸이 더 혹사를 당한 셈이다. 남편이 입던 바지들이 헐렁해졌고 팔뚝에는 붉은 자국들이 늘어났다. 남편은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야 했다.
나는 남편에게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규칙적인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며 피곤해서 멀리했던 책도 보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자고. 그동안 새로운 일에 도전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남편을 다독여야지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수십 년간 하면서도 이리저리 치이면서 보내는데 하물며 이제 고작 1년도 안 되는 사이 바람 잘 날 없이 세 군데나 옮겨 다니는 남편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지 못했다. 어떤 일도 갑자기 짠하고 이루어지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급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회사를 그만두면 큰일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남편을 보니 부럽기도 했다. 남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감사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제야 비로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법이란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