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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새벽 5시 48분의 판타지

  그가 자신은 특정한 체위나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간이 중요하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마시던 술을 모두 뱉을 뻔 했다. 남자의 성적 판타지라는 것은 거의 평범하지 않은 체위, 낯선 장소와 익숙한 도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녀의 첫 번째 연인이었던 K는 아주 깨끗한 흰 시트가 깔린 침대에서만 사랑을 나누려했다. K의 집에는 흰 시트가 아주 여러 세트 있었는데, 그녀가 집에 오면 침대 시트를 바꾸는 것을 가장 먼저 했다. 차를 내어준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하는 과정도 없이 다짜고짜 시트를 가는 K를 보면서 머릿속에 정말 섹스밖에 없는 건가 싶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K의 스킬은 두고두고 생각이 날만큼 훌륭했다.
  회사 입사 동기였던 L은 이론에 강한 교과서적인 남자였다. 야한 동영상을 보는 게 아니라 정말 체위를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영국 방송을 보고 와서 그대로 하자고 했다. 심지어 네이버 지식인에 체위의 종류를 알려달라는 질문을 올린 적이 있는데, 어떤 현명한 네티즌이 학생들도 이 글을 보고 있으니 궁금하면 책을 사서보라는 아주 멋진 답변을 달아주었다. L은 그 질문을 올린 게 민망하지도 않은지 그녀에게 이따위 댓글이 달렸다며 푸념했다. L은 성 전문가인 랜디 폭스가 쓴 ‘Love 101’을 바이블로 삼고 있었는데, L을 보면서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로만 공부했다는 말이 정말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인 했을 뿐이었다.
  거래처 디자이너였던 B는 체위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체위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사위는 12면체였는데, 각 면마다 그림으로 특정 체위가 그려져있었다. 사실 해외여행을 다녀오며 주사위를 장난스럽게 선물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B은 자신이 영화 인셉션의 디카프리오라도 되는 양 수시로 주사위를 던져서 체위를 확인했고, 시도했다.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후배위가 자주 나왔는데, B가 주사위의 모서리를 교묘하게 깎아 후배위를 자주 나오게 해놓았다는 걸 안 건 아주 먼 훗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서 그가 말하고 있다.
    
  - 제 판타지는 시간이에요.
  - 아, 지속 시간이요? 아니면 강약중강약?
    
  사뭇 진지한 표정의 J가 물었다. 오 마이 갓! 그녀는 인문예술모임이라고 해서 나온 이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어디부터가 인문이고 어디까지가 예술이란 말인가.
    
  - 뭐야, 강약중강약은? 강약, 강약약, 강약중강약? 이거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보다 2살 어린 이 모임의 주최자 Y가 물었다.

  - 그쵸, 리듬이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 키스, 애무 뭐 이런 시간 배분이나 빠르기 같은 거?
    
  그녀는 앞에 놓인 소주를 한 잔 더 따랐다. 차라리 취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앞섰다. 낯 뜨거운 이야기에 얼굴이 빨개지면 술 때문이오, 은밀한 농에 웃음이 나면 술 때문이오,할려는 심산도 있었다.
    
  - 수정씨는 어떻게 뭐 같아요?
    
  왜 하필 나한테 묻는 거야. 그녀는 J를 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 글쎄요, 뭘까요. 시간? 뭐 대낮에 하는 걸 좋아하시나? 낮술 즐겨하는 것처럼?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 역시 수정씨. 제법 그럴싸한데요?
    
  J의 말에 이목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는 것 같아 다시 소주병을 드는 순간 그가 소주병을 낚아채 그녀에게 따라주며 말했다.
    
  - 정답 맞췄으니까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정답주입니다.
    
  그녀는 소주잔을 찰랑찰랑 채운 소주를 보며 후회했다. 
    
  - 저는 정말 시간대가 중요해요. 예전에 영국의학저널에서 섹스하기에 가장 최적의 시간이 새벽 5시 48분이라는 걸 읽었거든요. 햇빛이 성욕을 향상시키는 테스토스테론을 분비하는 시상하부를 자극하기 때문에 딱- 그 동틀 무렵이 최적의 시간이라는 거예요. 물론 위도, 경도, 계절 마다 그 시간이 달라지겠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5시 반만 되면 잠에서 깨더라고요. 옆에 사랑을 나눌 사람이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전 오늘 술 많이 마실 겁니다. 매일 새벽에 깨니 힘들어요. 술 마시고 푹 자야지.
    
  그녀는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취하고 싶은데 술은 왜 이렇게 센 건지. 2차, 3차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인원은 줄어들었다. 몇 명은 택시에 태워보냈고, 몇 명은 조용히 사라졌다. 그녀는 새벽 1시에 도착한 만복국수집에서 그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는 꽤나 취한 것 같았다. 평소에는 1차에서 취해서 거의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가까이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 그래서 수정씨 판타지는 뭐예요?
  - 네?
  - 성적 판타지 말이에요.
    
  멸치국수를 먹으니 술이 좀 깨는 것 같아서 소주를 한 병 더 시켰다. 해장술이냐며 그가 웃었다, 소주를 한 잔 마시고, 국수를 한 젓가락 호르르 먹고나서 입을 열었다.
    
  - 저는요, 옷을 다 벗지 않고 하는 거요.
  
  그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취해서 졸고있거나 눈이 풀려있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요?
  - 나는 팬티랑 스타킹을 다리에 걸친 채로, 당신은 넥타이를 목에서 풀지 않은 채로.
  - 여자도 그런 판타지가 있구나.
  - 왠지 다 벗고 하는 건 너무 본격적인 것 같아서요.  
  - 원래 본격적으로 해야하는 거 아니었어요?
  - 그래서 판타지라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스타킹을 찢거나 하는 건 싫어요. 그 위로 애무하는 건 좋지만. 스타킹이 생각보다 비싸거든요.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 아, 웃어서 미안해요.
  - 괜찮아요. 이건 판타지니까.
    
  그가 테이블 아래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 우리 집에 갈래요? 
    
  그와 그녀는 그녀의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옷을 벗지 않았고,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는 이미 취했고, 그녀는 피곤했다. 두 사람 모두 깊은 잠에 들었다.
  그가 눈을 뜬 건 새벽 5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시계를 확인하곤 피식 웃음이 났다. 곤히 자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쌍꺼풀은 왼쪽에만 있고, 턱 아래에 작은 점 하나가 있었다. 귓불에는 귀를 뚫었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다시 그녀 옆에 누웠다. 
  시계가 조용히 5시 48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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