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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당신의 애인이 문예창작을 전공했다면

  그러니까 애초에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왜냐고요? 처음에는 장난 아니죠. 말을 참 조근조근 예쁘게 하는데 각종 이론을 들고 와서 자신의 의견을 이해시키려하거나 어떤 시점에 대해 설득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평범하게 말을 하고, 내 말에 동의도 하고,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갔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드는데 이미 그녀의 말에 따르고 있는 나를 발견해요.
  그거 아세요? 저기 있는 인도 가장자리에 있는 키 작은 나무의 이름이요. 길에서 자주 보던건데, 아파트 화단에서도 자주 봤는데 이름 모르시죠? 저 나무 이름은 회양목이에요. 열매도 열리는데 사실은 번식이 잘 안 돼서 꺾꽂이로 번식을 시킨대요. 30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은 저 나무의 이름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어요. 어떻게 꽃이며 나무며 이름과 생태를 그렇게 잘 아는지 궁금해 할 것 같죠? 전혀요. 그저 놀라웠어요. 지나치지 않는 관찰력을 가졌구나. 뇌섹남, 뇌섹녀 뭐 이런 얘기 하는 데 솔직히 말하자면 문창과 전공생들이 진짜 섹시해요. 그냥 저 나무 이름을 알려주려고 그 말을 꺼낸 게 아니라,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벤치 옆에 있던 키 작은 회양목을 기억하느냐며 사람을 홀리는 말을 하죠. 꼬리가 아홉 개가 아니라 스물아홉 개쯤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너무 행복하죠. 행복해서 미치게 만들어요. 본인은 웹툰을 보는 것도, 드라마를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다 공부래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니까요. 그래서 한 번은 제 자취방에 놀러왔는데, 자기가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이 뭔지 맞춰보라는 거예요. 둘 다 책은 많이 읽는 편이긴 했는데, 성향이 엄청 달랐거든요. 그래서 그냥 유명한 고전 소설 제목을 몇 개 말했죠. 사실 여자친구가 집에 놀러왔는데 대체 무슨 책 생각이 나겠어요?
     
  - 음, 오만과 편견? 노틀담의 꼽추? 춘향전? 
  - 아니, 그 중엔 없어. 그런데 자기 춘향전 내용 기억나?
  - 성춘향과 이몽룡?
  - 응, 그 두 사람이 몇 살에 사랑에 빠졌는지 알아? 
  - 열여덟 살? 스무 살?
  - 열여섯 살이었대. 
  - 엄청 어렸네? 애들이 발랑 까졌었구만!
  - 에이, 성숙하다고 해두자. 그래서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안 궁금해?
  - 무슨 책인데?
      
  제 물음에 물끄러미 저를 보더니 짧게 대답했죠. 
     
  - 소녀경.
     
  소녀경을 읽어본 사람은 없어도 그 제목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소녀경, 금병매, 옥보단. 중국 3대 금서잖아요. 뭐, 영화로도 나와서 영화로 본 적도 있을 테고요. 그 새침한 입에서 소녀경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속으로 비명을 질렀죠. 환호였어요. 키스까지 한 달이 걸렸는데, 이제 다음 단계로 나가는 건가 싶었어요.
  
  - 소녀경?
     
  애써 침착하게, 태연한 척 말했죠. 하지만 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렸을 게 분명하거든요.
     
  - 같이 읽을래?
     
  스물아홉 개의 꼬리가 그녀 뒤로 쫙 펼쳐지는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가방에서 책을 꺼냈어요. 하, 근데 얼마나 깜찍한지 산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더라고요. 반쯤 읽었는지 포스트잇이 가운데쯤 붙어있더군요. 그 부분을 펼치더니 말하는 거예요.
     
  - 소녀경은 황제와 소녀의 대화가 중심이거든. 내가 소녀 부분을 읽을 테니까, 자기가 황제 부분을 읽는 거 어때?
     
  영화만 봤지 책으로 읽은 적이 없으니 좋다, 싫다 말할 수도 없었고, 이미 그녀는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어요.
     
  - 여성에게 베개를 높이 베도록 하고, 두 다리를 벌리게 합니다. 남성은 그 가랑이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27회 운동을 한 다음 중단합니다. 이 체위를 사용하면 남성의 기를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다.
     
  뭐, 그 다음에요? 제가 다음 부분을 읽었을 리가 있나요. 상상 속에서는 이미 그 체위를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다음 그녀의 말에 저는 무너져버렸습니다.
     
  - 음, 상상이 돼? 자기는? 실습이 필요할 것 같아. 나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몸으로 배우는 걸 좋아하거든. 자기도 그렇지 않아?
     
  하나로 묶었던 긴 머리를 풀면서 그 말을 하는데, 그 순간 제 이성도 풀려버렸죠. 그날 밤, 저는 매주 한 번씩 108배를 드리러 가던 불자였음에도 기독교로 개종할 뻔 했어요. 그녀가 보여준 것은 정녕 천국이었어요. 하, 목탁 소리로 완성되는 세계가 아니었어요.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극락이 아니라 천국에 가야한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습니다. 우습게도요. 그녀는 정말 완벽했거든요. 네, 우리는 아주 성실하게 실습에 임했고 저는 그녀가 다양한 책을 끊임없이 읽고, 그 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어요.
  하, 그런데요. 책이 아름다운 연인이나 영원한 사랑만을 그려내지는 않다는 걸 너무 늦게 안 거죠. 책에는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인 부부도 있고, 처절하고 찌질하게 헤어지는 연인들도 있죠. 헤어졌어요, 우리는.
  헤어지고 나서 이 년 쯤 지났을 때, 네이버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그녀 이름이 올라오는 거예요. 워낙 흔한 이름이라서 동명이인이겠거니 했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페이스북은 차단되어있고, 인스타그램은 비공개라서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거든요. 뭐, 그립고 다시 연애하고 싶고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잘 사는지 궁금했어요. 어쨌든 그래서 그 이름을 눌렀는데, 그녀였어요. 일 년 전 쯤, 무슨 스토리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더라고요. 그 작품이 드라마로 방영된다는 기사였어요. 캐스팅된 배우가 엄청 핫한 남자배우였는데, 그 배우가 인터뷰를 하면서 원작을 쓴 작가님이 너무 예뻐서 작가가 아니라 신인 배우인 줄 알았다고 하는 바람에 덩달아 이름이 인기 검색어에 오른 거더라고요.
  그런데 그 소설, 그 영화- 순전히 우리 연애 얘기더라고요. 기사 읽다가 기가 막혀서 바로 서점에 갔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다 읽었죠. 출간된 지 1년 가까이 된 소설이었고, 그녀는 우리 연애사를 까발리는 소설을 써놓고도 연락 한 통 없었는데- 그 책을 다 읽고 거기에서 엉엉 울었어요. 소설에서 우리는 해피엔딩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에 제가 뭘 했을 것 같으세요? 그녀에게 연락이요? 아이고, 그럴 리 없죠. 그때 운 건 잠깐 흔들린 감정에 북받쳐서, 그녀가 나를 팔아 성공한 게 배 아파서 운 거였어요. 
  문창과인 그녀가 소설을 썼으니, 영화과인 저는 시나리오를 썼죠. 그래서 이번에 나오는 영화가 바로 그 영화입니다. 사람들은 멜로니 로맨틱코미디니- 이 영화의 장르를 그렇게 규정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 영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처절한 복수극이에요. 감정과 감정을 둘러싼 스릴러죠. 어마어마해요, 아주 그냥. 무엇보다 엔딩 크레딧까지 꼭 보셔야 합니다. 그녀가 소설 마지막의 작가의 말에 쓴 말이 있거든요.
     
  - 당신이 나의 뮤즈였어, 고마워.
라고.
     
  저도 거기에 화답하는 말을 엔딩 크레딧에 넣었어요. 이 영화의 핵심이죠. 제가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다고요? 에이. 그건 영화 끝까지 보시고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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