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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9. 2016

그 해 여름을 기억하는 방법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의 계절이 진행되는 나라에서 34년을 살아온 남자는 그 흐름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연애를 할 때는 사계절을 만나봐야 한다는 말을 신봉하였기에 봄에 만난 K와는 그 다음 봄이 시작되자마자 헤어졌으며, 여름에 만난 Y가 그해 봄에 헤어지자고 했을 때 울며불며 매달려서 여름에 헤어졌다. 가을에 만난 J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밝히며 그만 만나자고 했을 때, 남자는 다중연애를 고려해달라고 했고 J와 J의 여자친구 그리고 남자의 기묘한 연애가 그 다음 가을까지 이어졌다. P와의 연애는 겨울에 시작하여 그 다음 겨울을 넘겼고 봄이 막 시작될 무렵 끝이났다.
  남자는 사계절을 만나보아도 별 거 아니었던 연애가 있고, 한 계절만 만나보아도 삶의 방향이나 분위기를 바꿔놓는 연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남자를 잡아당긴 것은 놀랍게도 계절이었다.
  L이 말했다.
     
  - 그렇다면 나를 기다릴거야?
  - 응, 나는 너와 겨울에서 지금- 초여름까지만 보냈잖아. 한여름, 늦가을, 긴 겨울 모두 너와 보내고 싶어.
  - 좋아. 하지만 나는 이제 너와 다른 계절이 있는 나라로 가는데 정말 기다릴 수 있어? 나와 같은 계절을 보내는 게 아니잖아. 내가 오늘 저 비행기를 타는 순간, 너는 초여름에, 나는 한여름에 있게 되는데도 정말 괜찮아?
     
  모두 맞는 말이었다. L은 오늘 라오스로 떠난다. 라오스는 3개의 계절을 가지고 있는데, 건기, 우기 그리고 겨울이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 이 두 가지로만 구분이 될 뿐 온통 진한 여름이었다. 
     
  - 그게 우리가 정말 같은 계절을 보내는 거라고 생각해?
     
  L의 물음에 남자는 답을 찾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남자에게 있어 계절이란, 단순히 사계절을 함께 보내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벚꽃잎을 보는 눈빛이 만들어내는 풍경, 깊어가는 여름밤을 함께 걸으며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달뜰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늠, 전화를 걸어 귀뚜라미 소리를 가만히 들려주는 상냥함에 대한 화답, 조용히 쌓여가는 눈을 보며 쓰는 긴 편지들이 연애를 완성해간다고 믿어왔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발견하는 상대에 대한 마음과 애정을 향한 막연한 허기를 서로 어떻게 완성해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계절이 꼭 그 네 개의 계절로 치환이 되었다.
     
  - 참 이상하지. 계절과 시간 그리고 경도와 위도, 심지어 사랑과 연애까지 사람들이 그렇게 정의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해왔던 거 아니야?
     
  망설이는 남자에게 L이 던진 질문은 남자를 다시 망설이게 만들었다. L에 대한 어떠한 확신이나 기대감 같은 것이 있던 건가 다시 돌아보았다. 확신이라는 것은 L이 라오스로 봉사활동을 떠나는 2년을 이 봄과 같은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다는 마음이었고, 기대감은 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L과 더 많은 계절을 맞이할 것이라는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이 당도했을 때에 대한 설렘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남자는 답을 하기 어려웠다. 초여름과 한여름, 밤 9시와 저녁 7시의 차이가 실은 엄청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어쩌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어.
  
  남자의 말에 L의 눈빛에는 약간의 안도감이 묻어났다.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기에 짧지 않은 시간이 분명했고, 괜찮다고 말하기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마음은 아직 그 테두리가 완벽하지 않았다. L은 오히려 남자가 자신과 사계절을 보내야한다는 일종의 압박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 그냥 네가 아주 긴 여름을 보낼 동안, 나는 몇 개의 계절을 여행했다고 할게. 그러니 우리 다시 만나. 2년 뒤의 이 봄에. 네가 잠시 먼저 여름에 가있는 거라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거라고 생각할게.
     
  L은 남자를 꼭 끌어안았다. 남자에게서는 아주 옅은 눈물 냄새가 났다. 어쩐지 소나기가 올 것 같은 하늘이 그 뒤에 넓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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