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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영 Jan 28. 2023

무럭무럭 싹을 틔워내는 튤립 구근을 보며

튤립 수경재배하기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회사에서 어떤 한 직원분이 뜬금없이 튤립 구근 나눔을 했다.

친절히 튤립 구근 세 개를 전달해 주시던 분은, 안타깝게도 현재 퇴사하신 것으로 보인다.

귀여운 최고심 포스트잇에 “예쁘게 피우기!”라는 미션을 남겨놓고 그는 어디로 가신 걸까.

어쨌든 그렇게 남겨진 미션을 늦게나마 수행하기 위해, 냉장고에 쟁여놓은 구근 세 개를 정성스레 자리 놓아 본다.



 기다림이 있는 일은 설렌다.

평일에는 만나지 못하는 애인을 주말까지 기다리는 일, 어떻게 찍혔는지 돌아볼 수 없는 필름 카메라의 인화를 기다리는 일, 튤립 구근이 싹을 잘 틔워낼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냉장처리하는 일!

튤립 구근이 일정 기간 동안 저온처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온처리가 잘 되지 않은 튤립 구근은 온전하게 꽃을 피워내기 어렵다고 한다. 마치 다람쥐가 겨울에는 꼭 겨울잠을 자야 하는 것 같이, 튤립도 겨울잠이 필요한 것만 같아 귀엽다.


 나의 튤립 겨울잠은 예상보다 길어지게 되었다. 율무(고양이)가 다시 한동안 나와 함께 지내면서, 튤립은 6주를 넘어 네 달이 지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율무가 본가로 돌아간 후였다. 튤립 구근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냉장 보관해 두어서, 싹을 잘 틔워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버려야 하나 생각도 하였지만, 손이 가는 생명체가 집을 비우고 나니, 손이 가지 않는 생명체라도 그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길 바랐는지 ‘꽃이 잘 필지 안 필지는 일단 키워내면서 확인해 보지 뭐~!’라는 심정으로 튤립 수경재배 방법을 냅다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읽은 대로 구근의 껍질을 먼저 벗겨냈다. 그런데 이 구근 녀석, 세상 밖으로 그토록 나오고 싶었는지 물에 담그지도 않았는데 이미 머리 위로 작은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튤립을 수경재배할 때는 구근을 통째로 물에 담가서는 안 된다. 구근에 곰팡이가 피기 쉽다 한다. 뿌리만 물에 닿을 수 있도록, 물 안에 돌멩이를 깔아주거나, 사진처럼 일회용 커피잔 또는 페트병을 이용하여 엉덩이만 담가주면 된다. 물은 3~5일에 한 번 갈아주면 된다. 만약 구근에 곰팡이가 피면, 알코올솜으로 닦아주면 곰팡이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처음 껍질을 까고 보니 피부가 상해 있는 구근을 보고 너무 오랜 시간 냉장 처리를 하여 벌써 곰팡이가 핀 건가, 걱정하는 마음에 알코올 솜으로 닦아줬다. 지금은 거칠었던 구근의 피부가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던 지난주 토요일 나의 튤립 구근은 처음 물 위에 띄워졌고, 나는 연휴 동안 집을 비웠다. 주인이 집을 비워도 잘 자라나는 생명체라니, 식물이란 참 신기하고도 고맙다.



 연휴가 끝나고 본가에서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4일 만에 이렇게 자랄 수 있다고? 심지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 폭발적인 생명력은 오랜 시간 저온 처리를 한 데서 나온 걸까. 꽁꽁 오랜 시간 겨울을 보낸 만큼, 시기가 적절한 때 폭풍성장하는 구근을 보며 사람의 인생 같다는, 그리고 앞으로의 내 인생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튤립은 해가 잘 들지 않는 저온에서 잘 자란다. 그래서 봄이 되기 전 겨울철에 키우기 좋다. 따뜻한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생명이라니! 나처럼 무던한 사람에게는 참 고마운 생명.



 현재 세상 밖으로 나온 7일 차 튤립의 모습이다. 이제는 저 작은 페트병의 입구가 답답할 것 같다. 곧 예쁜 유리병에 자갈을 깔아 옮겨줘야지. 예쁜 꽃을 피워내기까지 잘 자라줄까? 독립하고 처음 키워보는 식물에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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