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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태원 Taewon Suh Mar 11. 2021

슈퍼 탤런트를 다루는 법

CSNY 그리고 애틀란틱 레코드

Crosby, Stills, Nash & Young은 1969년 결성된, 포크 록 혹은 컨트리 록 계열의 이른바 슈퍼 밴드입니다. 슈퍼 밴드라 하면 1966년 에릭 클랩튼이 포함된 Cream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1968년 크림이 해산한 후,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과 드러머 진저 베이커는 1969년에 또 다른 슈퍼 그룹인 Blind Faith를 결성합니다. 이 밴드의 리드 싱어는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과 트래픽 출신의 스티브 윈우드였습니다. 한편, CSNY는 1960년대 후반 싱어송라이터 무브먼트의 산물입니다. 이들은 하나의 하위 문화권을 이루며 다양한 협업 및 잼 세션을 펼칩니다. CSNY는 전형적인 아티스트들의 한 활동 양식에서 진전되어, 레코드 계약까지 이르게 된 경우이지요. 여기서 언급된 슈퍼 밴드는 다 애틀란틱 레코드사와 계약되어 있었습니다.


기존의 네임 밸류를 이용한 전략적인 슈퍼 밴드는 1980년대 중후반 대유행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밴드의 예를 들자면, 1982년의 Asia[유라이어 힙의 존 웨튼, 예스의 존 하우, EL&P의 칼 파머, 버글스의 제프 다운스]를 필두로 1984년의 The Firm[배드 컴퍼니의 폴 로저스,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 화이트 스네이크의 토니 프랭클린, AC/DC의 크리스 슬레이드]과 The Power Station[로버트 파머, Chic의 토니 톰슨, 듀란듀란의 존 테일러와 앤디 테일러]가 인기를 끕니다. 1988년에 들어서는 Bad English[The Babys의 존 웨이트와 리키 필립스, Journey의 닐 숀과 조나단 케인, Wild Dog의 딘 카스트로노보]와 유명한 Traveling Wilburys[밥 딜런, 비틀스의 조지 해리슨, 탐 패티, 로이 오비슨, ELO의 제프 린]가 등장합니다. 1989년 영국을 중심으로 한 Electronic[New Order의 버나드 섬너, Pet Shop Boys의 닐 테넌트, The Smiths의 조니 마, Kraftwerk의 칼 바토스]는 기대만큼의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미국의 Damn Yankees[테드 뉴전트, Styx의 토미 쇼, Night Ranger의 잭 블래이즈, 마이클 칼텔론]는 중박을 칩니다.

이러한 트렌드는 바야흐로 클래식 필드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1990년 The Three Tenors란 이름으로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그리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세 정상의 테너들이 같이 앨범을 내고 공연을 진행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 이러한 슈퍼 밴드의 형식은 더욱 다양한 방식의 협업으로 일상화되고 확장되어 발전하게 됩니다.


초기의 다른 슈퍼 밴드와 유사하게 CSNY는 단순한 친분으로 시작되어 전략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The Byrds 출신의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The Buffalo Springfield의 스티븐 스틸스는 평소 가까웠던 친구 사이였습니다. 스티븐 스틸스는 닐 영이 버펄로 스프링필드를 탈퇴하자 다른 멤버들의 허락 없이 크로스비를 공연에 참여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기화로 팀 내 갈등이 폭발하게 되고 스틸스는 종국에는 팀에서 쫓겨나게 되지요. 당연히 다른 기회를 찾고 있던 스틸스는 한 파티에서 the Hollies 출신의 인싸 그래험 내쉬를 만나게 되고 크로스비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어울리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음악적인 공통점이 있고 그들의 보컬 화음이 꽤 잘 어울린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요.


같이 연주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이들은 자연스레 밴드 결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틸스는 이 아이디어를 갖고 애틀란틱 레코드사에서 소소한 초기 비용을 당겨 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미 각기 잘 알려진 밴드의 멤버들이기에 이들을 한 밴드로 계약하는데 이르기까지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이 있었습니다.


수완가였던 애틀란틱 레코드사의 수장 아메트 에어터건[Ahmet Ertegun]은 항상 모든 것을 해결 가능하고 타협 가능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그래험 내쉬는 콜롬비아 레코드사의 소속이었지만, 그는 그것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콜롬비아 레코드사의 수장이었던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그에게 쉬운 상대였지요. 에어터건은 콜롬비아 소속이었던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그래험 내쉬의 소유권을 애틀란틱 소속이었던 밴드 Poco의 멤버 리치 퓨레이의 소유권과 맞바꾸는 트레이드 방식으로 CSN과의 정식 계약을 이끌어냅니다.


이 슈퍼 밴드의 탄생에는 에어터건의 수완이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실 소속 아티스트에 대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애틀란틱은 아티스트의 자율권을 가장 잘 보장해주고 각종 유화정책으로 그들을 머물게 하는 것으로 유명한 회사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장 먼저 인간적인 수준에서 상대방을 매료시킴으로써 접근하는 에어터건의 인성과 비즈니스 방식에 기초하는 것이었지요. 그에게는 누구와 만나든 쉽게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특별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치켜 올림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식이었지요.


한편, 아무리 팀 멤버들의 면면이 뛰어나도 리더가 없는 팀은 좋은 팀이 될 수 없습니다. CNS의 리더는 스티븐 스틸스였습니다. 그는 한 탤런트가 어떤 조건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고 더 밝은 빛을 내게 되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리더였습니다. 세 명으로 1969년 데뷔 앨범을 내고 4백만 장을 팔아 내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더 큰 성공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능력 있는 멤버의 추가 영입을 통해 화룡점정을 찍으려는 생각이었지요.


계약이 가능했던 스티브 윈우드와 지미 핸드릭스의 얘기가 먼저 나왔지만 그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틸스는 평소 투닥거리며 껄끄러운 사이였던 옛 동료 닐 영을 영입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미 같은 밴드에서 실력은 충분히 검증되었고 영은 버펄로 스프링필드에서 탈퇴 후에도 1969년 Crazy Horse와의 앨범으로 이미 플래티넘을 기록한 바 있었습니다. 스틸스에게 자신의 불편함은 큰 상관이 없었지요. 더 큰 성공을 위해서는 말이지요. 닐 영의 독특한 음색은 CSN의 하모니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 것이 확연해 보였습니다.


마침내 닐 영을 동등한 조건으로 영입하게 되어 CSNY의 완벽한 진영을 이루고 발매한 두 번째 앨범 [데자뷔]는 8백만 장을 파는 메가 히트가 됩니다. 당시 이들의 성공은 해체되어가고 있었던 비틀스의 그것과 비교할만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 거대한 성공으로 인해 밴드의 교만과 거만은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특히 스틸스는 성공을 크게 즐기는 타입이었습니다. 앨범 발매 전에 매니저 후보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가 한 첫마디는 "올 때 보니 근사한 롤스 로이스가 눈에 띄던데 그것 하나 사서 보내보세요"였습니다. 매 공연에서 앙코르 곡을 위해 흥행업자는 그들에서 백 불짜리 지폐 뭉치를 들이밀어야 했습니다. 또 한 일화는 두 번째 앨범을 위해 특별한 커버를 요청했던 일입니다. 조지아주의 종이공장에서 생산된, 가죽 느낌의 특수 재질의 종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4배의 비용이 더 드는 작업이었지요.


모든 이들의 요구에 대한 에어터건의 대답은 언제나 "원하는 대로 해줘"였습니다. 그는 소속된 아티스트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뽑는 것을 최우선시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결과는 주는 것보다 더 많은 리턴을 얻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는 아티스트를 원하는 방식에 끼워 맞추려 하는 것보다 그들의 선호하는 방식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쉽고 당장의 성과에 더 기능적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CSNY는 성장시켜야 하는 아이돌 밴드가 아니었지요. 그들은 커리어의 피크에 있었던 아티스트들이었습니다. 에어터건의 주된 전략은 탤런트의 육성이라기보다는 탤런트의 발견이었던 것입니다. 양식이 자연산보다 앞서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시장에서 양적으로 더 많이 유통되는 것은 양식이겠지만요.


아티스트의 관리는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밴드라면 항상 해산을 걱정해야 하지요. 성공하면 할수록 갈등의 요소는 증가합니다. CSNY도 전형적인 길을 밟게 됩니다. 조울증적이었던 스틸스와 영의 사이는 끝내 회복되지 않습니다. 멤버 간의 말다툼은 일상적인 것이었지요.


CSNY의 멤버들은 밴드 활동 사이사이 개별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산이라는 단어는 사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싫으면 같이 모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 이후 점점 소원해지던 이들의 관계는 리더 격이었던 스틸스가 약물에 탐닉하면서 진실성과 일관성을 일부분 상실하자 큰 동력을 잃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스틸스와 사귀던 싱어 리타 쿨리지가 그를 떠나 내쉬와 사귀게 되자 1973년 이후 밴드는 크게 흔들리게 되고 서로 간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지게 됩니다.


밴드의 끝이 보이는 듯하자 실망한 애틀란틱의 경영진은 이런저런 방책을 생각하다가 스틸스를 대체할 멤버가 없을까 하고 궁리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한 이름은 폴 매카트니였습니다. (뭐 그림은 나오는 생각이었지요.)


CSNY는 애틀란틱과의 6년 간 6장의 앨범 계약을 끝내 완수하지 못합니다. 물론 2개의 정규 앨범, 하나의 라이브 앨범과 또 하나의 컴필레이션 앨범은 다 멀티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회사에 충분한 수익을 벌어다 주었지요. 또한 1990년대까지 모였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면서 그들은 계속 애틀란틱을 통해 앨범을 발매합니다. 자신들에 대한 회사의 정책에 항상 불만을 토로하면서 말이지요. 끝내는 1997년 그래미상 애프터 파티에서 크로스비가 회사에 대한 불만을 막말로 토로하며 회사를 옮기겠다고 위협하자 에어터건은 간단하게 응답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이 말은 수십 년에 걸친 이들 관계의 허무한 종결이었습니다.



[Southern cross] by Crosby, Stills & Nash, live from their 1982 album [Daylight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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