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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태원 Taewon Suh Aug 12. 2021

서포머 징크스

Terence Trent D'Arby라고 불렸던 아티스트

블랙 뮤직, 소울 뮤직, R&B 등으로 총칭되던 African American 중심의 음악 장르들이 Urban Music 혹은 Urban Contemporary란 이름으로 메인스트림화 되었습니다. Hip Hop이란 용어도 종종 이를 대치해서 사용되곤 합니다. 이런 변화는 1980년 중후반에 주로 조성된 것입니다.

참고로, 2020년 6월 유수한 글로벌 레코드사의 중역들은 'Urban'이란 단어를 음악 장르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연판장에 싸인합니다. 대신 'Black Music'이란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어반이란 단어는 종종 부정적인 connotation으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에 의한 R&B와 Pop Rock의 융합, 프린스와 Funk Rock의 진화로 인한 백인 록 팬의 유입, 자넷 잭슨으로 대표되는 뉴 잭 스윙의 대대적인 유행, 홀 앤드 오츠를 필두로 필 콜린스와 조지 마이클 등의 백인 아티스트들에 의한 크로스오버 히트의 양산, 영국에서 시작된 네오 소울의 등장 등이 이 변화에 대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다양한 영향력의 동시대적인 발현에 의한 변화였습니다.


1980년대 후반 당시 슈퍼 레이블이었던 콜럼비아/소니 레코드사는 마이클 잭슨의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이어갈 탤런트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런던 지사에서 20대 중반의 끝내주는 신인을 찾았다는 연락이 옵니다. 매력적인 마스크, 복싱으로 다져진 늘씬한 몸매와 길쭉한 팔다리, 걸쭉하게 긁히나 묘하게 풍부하고 따뜻한 음색,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무대 퍼포먼스... Terence Trent D'Arby란 당시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티스트에게는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음악적인 포텐셜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였던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남성적인 매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브라운과 티나 터너에 마이클 잭슨을 더해 런던의 세련미를 코팅한 격이었습니다.  


슈퍼 스타? 누워서 떡먹기이자 따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콜럼비아/소니 레코드사는 빠르게 움직입니다. 곧 곡 선정을 시작하고 The Human League의 창단 멤버였으며 Heaven 17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Martyn Ware을 영입해 터렌스 트렌트 다비와 함께 앨범 대개의 곡을 프로듀스 합니다. OMD, The Pretenders, 그리고 The Cure 등과의 작업으로 유명한 Howard Gray의 도움도 받지요. 그의 데뷔 앨범은 브리티시 렉트로니카 혹은 뉴 로맨틱의 요소를 접합한 초기 네오 소울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런던에서 가장 핫한 장르였지요. 시장의 반응은 당연히 뜨거웠습니다.


Playing [If you let me stay] at Top Of The Pops (1987), 길쭉하니 자알 빠졌다...

데뷔 앨범 [Introducing the Hardline According to Terence Trent D'Arby]는 1987년 7월 유럽에서 먼저 발매됩니다. 발매 첫 3일에 백만 장을 팝니다.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놀랍게도 총 1백7십만 장을 팔아 5X 플래티넘을 얻어냅니다. 신인으로서 강력한 프로모션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미국에서의 반응은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해 가을에 발매했지만 다음 해인 1988년 5월에 피크에 오릅니다. 싱글차트를 정복한 [Wishing well]에 힘입어 2백만 장 더블 플래티넘의 판매고를 기록해냅니다. 결론적으로, 이 앨범은 전 세계에 걸쳐 현재까지 8백만 장을 팔아치운 메가 스매시 히트였습니다. A&R의 완벽한 성공작이었지요.


콜럼비아/소니는 마이클 잭슨의 상위 호완 후계자를 찾았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2집에 대한 기대는 섣불렀지만 만빵이었습니다. 애타는 기대감에 뉴욕 본사로 미리 그를 초대해 마무리 직전인 수록곡을 들어보기로 합니다. 노란색으로 물들인 그의 변한 모습에 흠칫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기대감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그가 전달한 음악을 플레이합니다.  


한 곡 두 곡 지나가면서 경영진의 말문은 완전히 막혀버립니다. "이것이 과연 터렌스 트렌트 다비더냐?" 1집과는 전혀 동떨어진 음악이었습니다. 기대와도 멀었습니다. 까놓고 말하자면 과도하게 혁신적이고 자아도취적인 마스터베이션이었습니다. 마틴 웨어가 주입했던 최신 런던 모드의 쿨함과 신선함은 모두 빠지고 다비의 패기 있지만 설익은 주관성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자기 주도적 만능 아티스트가 빠지기 쉬운, 전형적인 시장 오류였습니다.

신인 아티스트에게 서포머 징크스는 흔합니다. 시장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고 소비 대중과의 적합한 소통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황당하다는 반응에 대한 다비의 역반응은 "이게 지금의 나이고 내가 듣는 음악이야. 뭐가 잘못이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잘못은 아닙니다.)


컬럼비아/소니는 마케팅 예산을 거의 바닥까지 삭감해 버립니다. 돈을 더 잃을 이유는 없었지요. 2집 [Neither Fish nor Fresh]의 예상된 시장의 무반응은 아예 바닥마저 뚫어 버립니다. 빌보드 앨범 차트 40위권도 돌파하지 못하면서 데뷔 앨범의 찬란했을 금자탑의 기초석을 한 번에 날려버립니다.

터렌스 트렌트 다비는 미국 맨해튼 출생입니다. 플로리다에서 자라면서 십 대 때 복싱으로 주 챔피언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나 곧 중퇴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당시 서독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복무하게 됩니다. 가스펠 가수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을 컸던 그는 독일에서 The Touch란 밴드 생활을 시작합니다. 군대까지 탈영해가며 말이지요. 1986년 독일을 떠나 런던에 정착하게 되고, 얼마 안 되어 콜럼비아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1987년 그의 데뷔 앨범이 대박을 친 후 2년 후인 1989년에 밴드 The Touch의 프로듀서였던 Frank Farian은 초기 넘버들을 편집해 앨범을 냅니다. 2집 앨범 발매일의 바로 며칠 전이었습니다.
프랑크 파리안은 1990년 (필자와 전미음악협회를 포함한) 전 세계를 농락했던 개구라 밴드 Milli Vanilli의 배후 인물입니다. 1970년대 인기 밴드 Boney M의 창조자이기도 합니다(한국에서도 [Sunny]로 잘 알려져 있네요).


터렌스 트렌트 다비는 2집 앨범 대실패의 수렁에서 끝끝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1992년 2집이었어야만 했을, 강렬한 3집 [Symphony or Damn]을 내놓지만 영국을 제외한 시장의 반응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2001년 그는 "터렌스 트렌트 다비는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이름을  Sananda Maitreya로 개명합니다. 업계에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Title Image: Terence Trent D'Arby circa 1987


[Wishing well] by Terence Trent D'Arby, live in Londo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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