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옹벽이 앞을 막아선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흙을 막고 길을 지탱하고 있다. 옹벽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무겁고 견고하게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하지만 눈을 가까이 대면 옹벽의 표면은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빗물이 배수구에서 시작해 아래로 길게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하다. 물은 방향을 정하지 않는다. 다만 중력의 부름을 따라 정직하게 아래로 흐른다.
물이 흐른 자리에는 녹물이 스며들어 흔적을 남겼다. 콘크리트 속 철근이 부식되고, 그 붉은 통증이 겉으로 배어 나온 것이다. 갈색과 주황색이 뒤섞인 무늬는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칠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완벽하게 밀봉하려 했던 인간의 의지는 시간과 습기가 찾아낸 미세한 틈 앞에서 무너졌다. 옹벽의 누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빗물 자국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세로로 길게 늘어진 삼각형 모양이다. 뾰족한 성당의 첨탑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눈물이 흘러내린 궤적 같기도 하다. 어떤 자국은 폭 10센티미터, 길이 1미터에 달한다. 배수구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중력을 따라 내려가다가, 콘크리트의 미세한 요철을 만나 좌우로 갈라지며 가지를 친다. 일시적이었던 빗물의 행위가 영구적인 콘크리트 위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사실 누수는 아름답기 전에 경고다. 내부가 부식되고 있다는 증거이며, 완벽했던 덩어리에 균열이 생겼다는 신호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완벽하게 채워진 상태로 영원히 버틸 수 있는 인생은 없다. 나 역시 육십 년을 옹벽처럼 단단해지려 애쓰며 살았다. 하지만 세월은 결국 내 안의 틈을 찾아냈고, 그 틈으로 슬픔과 후회, 고통의 녹물이 배어 나왔다.
나는 옹벽 앞에 서서 내 삶의 얼룩들을 생각한다. 숨기고 싶었던 실수들, 지우고 싶었던 마음의 흠집들. 예전에는 그것이 부끄러워 덧칠하고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얼룩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라는 캔버스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무미건조한 회색 벽에 불과했을 것임을.
가장 단단한 물질 위로 가장 부드러운 물길이 지나가며 만든 추상화. 옹벽은 자신의 완벽함을 포기하고, 시간이 새긴 흠집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는 이제 내 삶에 흐르는 녹물 자국을 억지로 닦아내지 않기로 한다. 흠집이 있어 빛이 들어오고, 누수가 있어 무늬가 생긴다. 그 지저분하고 붉은 흔적들이 모여, 비로소 나라는 단 한 점의 그림이 완성되었음을 이제야 가만히 긍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