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학자의 이야기
우선 제목이 맘에 쏙 들었다. 강의 혹은 레슨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기대감을 준다. 어렵게 공부하고 끙끙 앓았던 부분을 시원하게 정리해 주고 요약해 주는 느낌이다.
대학교 때 가장 많이 검색했던 단어는 『강의노트』였다. 수업을 통해서 또 교과서를 통해서 얻었던 정보를 요약해서 재습득하고 싶었다. 물론 중간/기말고사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부의 시험은 통상 새로운 문제에 대한 답보다는 배웠던 것의 짧은 시간 내 요약이니까.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라는 독후감을 싫어한다. 중독성이 책에 비해 몇 배는 강한 유튜브나 넷플릭스라면 모를까, 평일이든 주말이든 직장인에게 물리적인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우는 잘 없다.
대신, 이 책을 나는 시간을 쪼개서 읽었다. 출퇴근하면서 랜덤하게 듣는 타인의 플레이 리스트 음악이나 20분 이상 지인이나 엄마와의 긴 통화가 자차 출퇴근의 큰 장점인데, 그것을 포기하고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읽었다. 점심을 후다닥 해치우고 서울식물원의 벤치에서 읽었다. 10월 13일 Apple 앱스토어 “투데이”에 새 오리지널 시리즈가 전면에 광고되는 것을 보고서는 최선을 다해 마지막을 읽었다. 제목에 반해 2022년 1판 1쇄를 사 두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던 내게는 2023년 올해의 소설을 만나게 된 행운이었다.
읽으며 접어둔 페이지가 꽤 된다. 이 책을 읽어낸 독자나 평론가라면 “1960년 여성의 사회 진출과 그에 대한 편견을 다루는 여성주의 소설”이라는 Dry 한 소개를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이야기만으로 흥미진진함을 주기는 쉽지 않은데, 그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 2권 맨 마지막에 실린 엘리자베스 조트(주인공) 가상 인터뷰와 옮긴이(심연희)의 말에서도 큰 감동과 재미를 얻었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옮긴이의 말 중 Best of best였다!)
더불어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1957년생 저자가 60세 중반에 쓴 첫번째 소설이라는 점이다. 카피라이터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소설에서 중요한 소재로 쓰이는 조정을 즐겨하는 저자의 데뷔작이다.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다룬다. 아내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두 번의 이직을 통해 세 번째의 직장을 다닌다. 교육공학 석사이자 박사 과정생으로서 우수 논문상을 받으며 Unique 한 커리어를 개척해 가고 있다. 오랫동안 아내를 아내가 누군가의 엄마나 나의 아내라기 보다는 동료로 생각해 왔다. 동료이자 친구로서 아내를 있는 그대로 존경한다.
“저는 캘빈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캘빈은 총명하고 상냥하기도 했지만, 나를 진지하게 대해준 최초의 남자였으니까요. 모든 남자가 여자들을 진지하게 받아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교육이 바뀔 겁니다. 노동력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결혼정보회사는 파산할 겁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저는 「6시 저녁 식사」를 통해서 화학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여자들이 화학을 이해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테니까요.”
2023년 노벨 경제학상은 “여성 노동력과 성별 소득격차, 소득 불평 등 여성 노동”을 연구한 클라우디아 골딘(“for having advanced our understanding of women’s labour market outcomes”)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1990년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 최초로 여성 종신교수로 임명됐으며 2013년에는 전미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의 사회 참여, 여성 노동력에 관한 좋은 논의가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QvqQukpADM
“엘리자베스 조트는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텔레비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똑똑한 사람이다.
“얘들아 상을 차려라. 너희 어머니는 이제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제 한껏 부푼 마음으로 Apple Original 『레슨 인 케미스트리』를 주말 동안 시청하려 한다.
『히든 피겨스』 도 다시 봐야겠다.
https://apps.apple.com/kr/story/id1705844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