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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유년 시절

자존감의 회복

by Bird

우리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어떤 감정들은 마치 오래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불안도 그렇다. 마치 몸에 새겨져 태어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 뿌리는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아주 이른 시절부터 자라기 시작한다.

불안이 많은 아이가 꼭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세상은 거울과 같아서, 아이는 자신이 비추는 세계가 안전한지 위험한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아주 이른 나이에 판단한다. 만약 그 거울이 늘 금이 가 있고, 자주 깨지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면 아이는 세상을 경계하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사랑을 믿기 전에 생존을 배우고, 표현하기 전에 숨는 법을 익힌다.


반대로 넉넉하고 따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반드시 불안이 없다는 보장도 없다. 어떤 감정은 유전처럼 흐르고, 어떤 상처는 부모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은밀히 전해진다. 말하지 못한 두려움, 감정의 결핍, 그리고 무심코 주고받은 표정 하나까지도 아이는 언어보다 먼저 배운다. 그래서 불안은 단순히 환경의 결과물이 아니라, 관계의 기록이고 감정의 유산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많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자존감은 어린 시절 양육환경과 깊이 연결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자존감은 ‘내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그 믿음은 누군가 나를 조건 없이 바라보았을 때 자란다.


부모가 완벽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아이의 마음이 흔들릴 때 그 옆자리에 있으면 충분했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혼내기보다, 다쳤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봐 준다면 아이는 세상을 신뢰할 수 있는 곳이라 배운다. 그 신뢰가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면 어떨까? 어린 시절 상처와 불안, 낮은 자존감이 마치 내 운명처럼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회복력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린 성장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상처를 다시 해석하고, 자신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자존감은과거의 결과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평가이며 앞으로 계속 다시 쓸 수 있는 자기 서사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안이 많다고 해서 그 아이가 불행한 환경에서 왔다고 단정하지 말 것.

그리고 자존감이 낮다고 해서 그것이 평생의 낙인이 될 거라 생각하지 말 것.


어린 시절은 이야기의 첫 장일뿐이다.

우리는 언제든 다음 장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은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제,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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