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으로 사람을 남기고, 감정으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길들인다’는 말은 거칠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를 오래 쓰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조직에서 길들여지는 건 사람이 아니라 기준이라는 것을.
나는 40대 후반의 팀장이다.
요즘 들어 젊은 부하직원들과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가까운데,
정서적으로는 점점 멀어진다.
그들은 똑똑하고 빠르다.
그리고 솔직하다—너무 솔직해서
가끔은 사람을 베는 줄도 모른다.
존중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이 듦을 끄집어내
면전에서 무시하는 그들의 무례한 태도 앞에서는
나 조차도 흔들린다.
예전의 나라면,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권위를 앞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 방식은 나를 이기게 하지 않고,
그들을 더 자유롭게 만들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방식을 바꿨다.
말을 줄이고, 기준을 늘렸다.
누군가 무례한 말을 했을 때
나는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결과를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 선택으로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정리해 볼까요?”
“그 판단의 근거를 문서로 남겨주세요.”
감정은 흘러가지만,
기록은 남는다.
그리고 기록은 사람을 길들이지 않는다.
사람을 현실로 데려온다.
나는 그들에게 충분히 많은 기회를 줬다.
과제도, 역할도, 설명도 아끼지 않았다.
그 대신 기준은 단 한 번도 낮추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무례한 사람들은
자유로운 조직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기준이 없는 공간을 원한다.
그래야 자신이 평가받지 않으니까.
기준이 명확해지자
그들의 말은 조심스러워졌고,
회의에서의 태도는 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달라지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힘들어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길들이는 건 상대가 아니라
환경이라는 걸.
누군가는 기준에 적응했고,
누군가는 떠났다.
나는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 팀은 이 속도와 이 방식으로 갑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선택은 늘 개인의 몫이다.
다만 그 선택이
감정이 아니라 현실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판을 깔아줄 뿐이다.
나는 여전히 팀장이다.
무례한 말을 듣지 않게 된 건 아니다.
다만 그 말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길들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을 꺾는 법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는 법을.
그리고 그 기준 앞에서
나 역시 예외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먼저 길들이고 있다.
어쩌면 팀장이 된다는 건
누군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기준 하나를
조용히 지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그 기준을 들고
회의실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