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이 사라진 사회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면,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오히려 가장 먼저 떠오른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놀 거리도 넘쳐난다. 결핍은 사라졌고, 불편함은 빠르게 제거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풍요 속에서 아이들의 눈빛은 점점 무언가를 갈망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 간다. 하고 싶은 것이 없고, 꼭 이루고 싶은 꿈도 잘 보이지 않는다. 욕망이 없는 세대라기보다, 욕망을 키울 틈이 없는 세대에 가깝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공부란 원래 결핍에서 시작된다. 모르는 것이 불편하고, 뒤처지는 것이 두려울 때 사람은 책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뒤처질 틈도, 불편할 시간도 없다. 조금만 힘들어 보이면 어른들이 먼저 나서서 길을 평평하게 만든다. 아이는 넘어질 기회를 잃고,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는 법도 배우지 못한다.
사회는 더 이상 아이를 훈육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훈육을 두려워한다. 아이를 타이르는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걱정하고, 규칙을 세우는 순간 폭력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공동육아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던 마을의 시선은 사라졌고, 아이를 바로잡는 일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아이의 잘못은 언제나 부모의 실패로 환원된다. 아이는 책임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보호의 대상에만 머문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연스레 고집이 세진다. 고집을 꺾어 줄 외부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과 부딪히며 조율하는 경험이 줄어들수록,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만 이해된다. 협동은 선택 사항이 되고, 양보는 손해처럼 느껴진다. 함께 살아가는 법보다, 혼자 불편하지 않게 사는 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문제는 이 아이들이 잘못 자라고 있다는 단정이 아니다. 그들 역시 이 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결핍을 제거하고, 갈등을 회피하고, 훈육을 죄악시한 어른들의 선택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성향으로 남는다. 아이들은 그저 주어진 규칙 안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불편함을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답답함, 실패의 아픔, 타인과의 마찰에서 오는 어색함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욕망을 배우고, 협동을 연습하며, 자기중심에서 벗어나는 법을 익힌다. 아이를 보호하는 사회가 아니라, 아이를 단단하게 만드는 사회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이들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자라게 하고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