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능성은 퇴근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같은 문을 통과한다.
카드키를 찍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익숙한 자리로 돌아간다.
이 반복은 어느새 출근이 아니라 수감 절차처럼 느껴진다.
누가 나를 가둔 것도 아닌데, 나는 매일 스스로 들어간다.
생계라는 이름의 자발적 수감이다.
직장은 효율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인간을 온전히 담기에는 너무 좁다.
여기서 나는 이름이 아니라 역할로 불린다.
가능성은 질문받지 않고, 성과만 점검된다.
잘해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이 돌아온다.
더 해보겠다고 하면 시스템을 흔든다는 이유로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확장되는 사람이 아니라 최적화되는 사람이 된다.
어느 순간 깨닫는다.
나는 벼룩처럼 뛰지 않는다.
뛰지 못하는 게 아니라, 뛰지 않도록 길들여졌다는 걸. 보이지 않는 천장에 몇 번이고 머리를 부딪히다 보면, 결국 그 높이가 내 한계라고 믿게 된다.
뚜껑을 열어도 더 이상 뛰지 않는 벼룩처럼, 나 역시 안전한 높이만 넘는다.
숨이 막히는 이유는 몸이 아니라 가능성이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떠나지 못한다.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다.
책임이 있어서다.
월말의 숫자들, 가족의 생활, 당장의 안정.
이 무게 앞에서 자유는 언제나 미래형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문을 통과한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가장 위험한 생각이 고개를 든다.
“여기서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인가?”
아니다.
회사는 측정 가능한 것만 본다.
인간의 깊이와 방향성, 아직 쓰이지 않은 가능성은 대부분 보고서에 들어가지 않는다.
평가받지 못한 것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다만 측정되지 않았을 뿐이다.
직장을 당장 부술 수 없다면, 적어도 안에서 나를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
직장은 생계 수단이지 정체성이 아니다.
내 전부를 이 공간에 증명하려 들수록, 나는 더 빨리 닳는다.
가능성까지 출근시키는 순간, 회사는 나를 쓰고 버릴 권리를 갖게 된다.
언젠가 나는 이 문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아직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끝내기엔 나는 아직 너무 크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다짐한다.
나는 출근은 하되, 내 가능성은 퇴근시키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