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인 식탁: 문학 속 식탁이 오늘의 식탁과 만날 때
“먹을 게 없다”던 말을 한숨처럼 내뱉던 어느 겨울, 충동적으로 SNS에서 자주 보이던 요리수업을 등록했다. 손이 가는 채소가 없다고 투덜대다가 감자나 당근, 연근 같은 뿌리 채소를 활용한 요리 사진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겨울에도 잘 먹을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것 같은 음식 사진에 홀려 2주에 한번씩, 겨울부터 초봄까지 요리를 배우러 다녔다.
차갑고 단단한, 얼룩덜룩한 흙이 뭍은 뿌리 채소는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시장에 가면 자주 보였지만 맛있게 조리할 자신이 없어 외면했던 감자도 나에겐 낯선 재료였다. 선생님은 깨끗하게 씻은 제철 돼지감자를 한조각 얇게 잘라 학생들의 손바닥에 하나씩 놓아주며 말했다.
“겨울엔 먹을 게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땅 밑에서 자라나는 뿌리 채소만 잘 요리해도 식탁이 풍성해져요.”
돼지감자를 씹는 순간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버렸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숲에 들어섰을 때 나는 흙향이 났고, 입 안에서 꼭꼭 씹어 먹을수록 생밤을 먹는 것 같은 단맛이 은은하게 퍼졌다. 차분하기만 하던 선생님의 표정에도 설렘이 비쳤다. 어때요, 감자 맛 좀 알겠어요 이제? 그런 눈빛이었다. 재료의 향과 씹는 맛에 집중하는 법을 감자를 통해 배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해온 식재료에 대한 편견이 허물어졌다.
내 눈에 감자는 늘 돌멩이 같았다. 일단 입에 넣는 순간 명치까지 막히는 듯한 텁텁한 맛이 취향이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교환학생 신분으로 독일에 살던 시절, 학생 식당에서 매일 감자를 밥 대신 먹다가 질릴대로 질린 탓이었다. 그러고보니 그때도 “먹을 게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네.
<라이프>지에서 선정한 ‘세계 인류 역사에 영향을 끼친 100가지 사건’ 중 하나로 감자 재배가 꼽힐 정도로 그 공로를 인정 받은 식재료지만, 사실 감자를 둘러싼 오해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처음 유럽에 감자가 들어왔을 때만 해도 울퉁불퉁한 생김새와 불결한 땅 밑에서 자라난다는 속성 때문에 ‘악마의 음식’이라 불리며 매독의 원인이라는 오해까지 받았을 정도다.
감자의 우수한 생산성을 높게 산 독일의 프리드리히 3세는 감자 재배를 장려하기 위해 귀족 사이에서 감자꽃을 활용한 장식을 유행시키는 등 감자를 ‘귀족적인 음식’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으로 치면 ‘브랜딩’에 공을 들인 것이다. 가진 장점에 비해 억울할 정도로 인기가 없던 감자는 곧 기근을 해결하고 싶었던 지도자의 장려 정책과 생명력, 포만감 덕분에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식탁에 올라와 굶주림을 해결했다. 독일의 한 학생 아파트에서 매일 “먹을 게 없다”며 한숨 쉬던 외국인 유학생의 굶주림도, 그리고 건지섬이라는 영토에서도.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미심쩍은 단어들의 조합은 ‘감자의 생명력’과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배경을 이해해야 해독이 가능하다. 영국령 건지섬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상륙해 강제 점령을 당한다. 독일군, 독일군이 끌고온 전쟁 포로, 그리고 건지섬에 살고있던 주민이 뒤섞이며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처럼 불안한 상황에 놓인다. 독일군은 군수 물자는 물론 식량 자원까지 섬에 있는 자원이라면 새끼 돼지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헐어간다.
“순무를 넣고 끓인 수프” 같은 영양가 없는 음식으로만 배를 채우던 빈곤한 상황에서 별안간 마을 주민 ‘도시’는 은밀한 초대를 받는다. 감히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숨겨둔 간 큰 주민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돼지를 몰래, 혼자 요리해 먹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이웃을 불러 돼지고기를 잡아 한밤중 바베큐 파티까지 연 셈이니 비밀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 결국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 앞을 독일군 병사가 가로막는다.
통금 시간이 지났는데 뭐하고 있느냐는 추궁이 시작되고, 이때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이 ‘문학회 모임’을 들먹인다. 독일군은 점령지의 문화 예술 활동을 장려한다는 방침이 있었기에 북클럽은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주었고, 엘리자베스는 즉흥적으로 문학회 이름까지 지어 둘러대는데, 그때 붙인 이름이 바로 ‘감자껍질파이’다. 그렇게 단 한번의 거짓말로 인해 건지섬 최초의 문학회 모임이 탄생했다.
소설에 따르면 ‘감자껍질파이’란 “버터와 밀가루가 부족하고 설탕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으깬 감자를 소로 넣고 비트 즙으로 단맛을 내고, 감자껍질을 파이 껍질로 사용”한 음식이다. 감자껍질파이를 처음 만들었다는 ‘윌 시스비’라는 인물은 아마 플랜 B를 떠올리는 전략적 사고가 발달한 인물일 것이다. 감자 몇 알과 무, 연골을 넣은 국물로 주린 배를 겨우 채우던 시기에 활용 가능한 자원을 쥐어짜내 새로운 음식을 개발한 셈이니.
요리를 하면 어쩔 수 없이 매일 ‘플랜 B’를 떠올리는 훈련을 하게 된다. 레시피를 쫓아 장을 보다보면 매일 장바구니가 터지도록 담아도 부족하기만 하니 어떻게든 가지고 있는 걸 잘 써먹는 방법을 찾아본다. 자연히 요리를 자주 할수록,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재료가 늘어날수록 “먹을 게 없다”는 소리가 줄어든다. 요리란 결국 재료의 특성과 잘 어우러지는 조리법을 교차하며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여차하면 플랜 B를 떠올리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이 생기고 나서는 장을 보는 횟수와 시간도 줄어들었다.
돼지고기 먹으려다 북클럽 회원이 됐다는 엉뚱한 이야기처럼, 세계대전이라는 엄혹한 시대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분위기는 꽤나 유머러스하고 낙천적이다. 건지섬 주민들은 마치 원래 책을 읽으려고 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책장을 넘기고, 감상을 나눈다.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려고 오는 회원도 있고 누군가에게 책은 장작 대신 불을 지펴 몸을 데울 수 있는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조차 가끔은 손에 쥔 종이에 적힌 문장을 신중하게 낭독한다. 문학은 건지섬 주민들의 배를 불려주진 못했지만 다같이 모여 앉을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둘러앉아 함께 물고 뜯을 이야기 거리가 샘솟는 그 밤에 주민들은 굶주릴지언정 두려워하진 않았다. 종이책은 불을 지펴 몸을 데우는 훌륭한 연료가 되어주고, 문학은 고립되기 쉬운 시대에 대화의 불씨를 지핀다.
두 계절 내내 요리 수업에서는 “레시피에 의존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처음엔 레시피를 보지 말라는 선생님 말씀이 의아하기만 했다. 그럼 뭘 보지? 어떻게 요리를 하라는 거지? 냄비의 상태와 불의 세기에 따라 ‘0분’의 0에 적힌 숫자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입맛에 따라 간장 ‘0스푼’의 0라는 숫자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차차 받아들였다. 레시피 띄운 휴대폰 화면을 옆에 두고 요리를 하던 습관도 사라졌다. 조리 순서와 양념의 배합 정도만 참고하고 간을 보면서 레시피가 아닌 ‘감’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감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난해한 요리도 많다. 전쟁통에 건지섬에서 개발한 ‘감자껍질파이’처럼.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동명의 영화에서는 독한 술이 없으면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맛”이라 말하고, 소설의 저자는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요청에 대해 모르는 게 낫다는 식으로 얘기하며 파이를 재현하려는 독자들의 노력을 뜯어말린다. 이렇게까지 뜯어 말리니까 해보고 싶네?
소설 속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감자만 있으면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는 손쉬운 레시피가 필요했다. 음식은 모름지기 맛있어야 하니까, 식감도 중요했다. 영미권의 호기심 많은 블로거들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시도한 몇 가지 조리법을 추리고, 내 친구 Chat GPT의 도움을 받아 오븐 없는 집에서도 구울 수 있는 감자껍질파이 레시피를 정리했다. 감자를 껍질까지 쓴다는 게 낯설었지만 지난 겨울 배운대로 레시피를 한번 읽은 뒤 가급적 냄새와 촉감, 감자의 상태와 향에만 집중하며 요리를 완성해나갔다.
감자 껍질을 깎는 동안 손재주가 좋지 않아 여러 번 위기가 있었지만 최대한 얇고 길게 깎았다. 껍질을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바삭하게 굽는 동안 갓 구운 감자칩에서 나는 냄새가 나서 군침이 돌았다. 수분이 사라진 껍데기는 정말 기름기가 쏙 빠진 감자칩 같은 향이 나서, 늦은 밤 감자칩이 갑자기 먹고 싶을 때 대신 먹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구수한 흙내음을 간직한 껍데기를 깔아두고, 고소한 버터와 볶은 양파, 두유를 넣고 감자를 으깬 속을 만들었다. 크림처럼 진한 맛이 나는 속을 채워넣고 기기에 넣고 굽는 동안 진하고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집안을 뒤덮은 솜이불 같은 냄새를 맡으며 독한 술 없어도, 굶주리지 않아도 생각이 날 만한 좋은 레시피를 발견했다는 ‘감’이 왔다. 이런 플랜 B라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으니 잊지 않도록 기록해 본다.
감자 2개를 흙을 깨끗하게 털어내어 준비한다. 껍질을 깨끗하게 씻는다
감자 껍질을 얇게 벗겨내고 물기를 제거한 뒤 에어프라이어에 180도, 5분 정도 돌려 바삭하게 만든다
바삭하게 구운 껍질을 파이 바닥처럼 그릇에 깔아준다
감자는 찌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려 충분히 익힌다
팬에 버터를 두른 뒤 잘게 다진 양파를 익힌다
찐 감자와 익힌 양파, 두유나 우유 또는 크림 3~4큰술을 넣고 으깨 속을 만든다. 이때 소금, 후추를 뿌려 간을 맞춘다
감자 껍질을 깔아둔 그릇에 간을 맞춘 속을 넣고 180도로 10분에서 15분간 굽는다. 겉이 노릇해지면서 살짝 부풀어오르면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