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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ed thoughts May 04. 2024

오늘은 아빠가 주인공

2024년 5월 3일 금요일 - 81일 차

☁ 푸릇푸릇한 아침으로 시작해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회색빛의 오후가 되더니 푸르스른한 저녁으로 마무리된 하루.


 요즘 우리 가족의 창작 열기가 대단하다. 엄마는 시 수업을, 나는 에세이 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문집에 실릴 글을 준비하고 있다. 아빠는 최근에 접하게 된 책의 영향으로 시와 에세이 그 사이 어딘가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합평의 시간을 가지는데, 오늘은 아빠가 쓴 글을 볼 차례였다.

 합평 모임은 순조로웠다. 다음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갑자기 아내랑 딸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최근에 뭐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다. 죽을 때가 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이럴 때가 있다.

엄마: 그럼 평소엔 안 보고 싶어?

아빠: 보고 싶지~ 근데 24시간 내내 보고 싶어 할 순 없잖아.

엄마: 나 또 할 말 있어. 큰 잘못을 하거나 죽을 때가 되어야만 보고 싶은가?

아빠: 나는 그래.

나: 근데 아빠 죽을 때 되어본 적 없잖아.

아빠: 그렇지. 근데 다들 그렇지 않나? 죽을 때 되면 주변 사람들 보고 싶은 거?

나: 그럼 잘못한 게 있을 땐 왜 보고 싶어? 오히려 피하고 싶을 것 같은데.

아빠: 잘못한 게 있으니까 잘해주고 싶은 거지.

나: 아~ 남자 친구가 바람피우고 여자 친구한테 꽃다발 사다 주는, 뭐 그런 건가?

아빠: 그런 거지!

나: (열심히 메모하며) 오! 이거 오늘 글쓰기로 좋은데? 내가 써야겠다.

엄마: (깔깔대며) 다 자기 거 챙기기 바빠. 나는 시 쓰고 있는데.

아빠: 고만해~ 아빠 힘들어.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유학을 시작한 지 17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부모님과 연락은 일주일에 한 번씩, 5분 정도만 허락됐다. 국제 전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영상 통화가 생기면서 부모님과 자주, 오래 연락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 친구들이랑 있었던 일, 오늘 들었던 생각 등 재잘재잘 떠들다 보면 몇 시간은 우습게 흘렀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아빠를 평일에 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꼭 전화를 했다. 하지만 아빠는 처음에만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금방 스윽 사라져 버렸다. 결국 주말에도 엄마와 나만 몇 시간씩 수다를 떨었다. 대화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아빠가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에 주도권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아 내심 서운했다.

 세 식구가 모두 글쓰기를 시작한 뒤 대화가 달라졌다. 아빠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가까이 와 엄마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나는 화면에 가득 찬 엄마 아빠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늘은 아빠가 주인공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 모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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