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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13. 2019

TV 속의 그녀의 풋밤_03

단편소설집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나는 갑자기 사무적인 투로 말하고 나서 수화기를 손으로 감싸 틀어쥐었다. 그리고 거실의 흐릿한 조명을 등지고 선 벌거벗은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의 나체는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다. 약간 내민 오른쪽 다리와 왼다리 사이로 숱 많은 음모가 불빛을 받아 한올씩 드러나 보였다.

한밤중에 웬 전화예요? 깜짝 놀랬잖아, 혼자서 중얼거리는 줄 알고.

아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 음성에 끈적끈적한 무엇이 배어 있었다. 다가온 아내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이 불같이 뜨거웠다. 그리고 아내는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이끌어 자신의 가슴에 가져갔다. 아내는, 혼자서 잠이 들었다가 한 밤중에 깨어 오줌을 누고 나서 내게서 섹스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니, 자극을 요구하는 것이다.

중요한 일을 깜빡 잊고 처리하지 않은 게 있어서 그래.

나는 팽팽하게 긴장한 그녀의 젖가슴에서 살짝 손을 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난 지금 급해요.

아내가 나른한 음성으로 말하면서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뜨거운 그녀의 손이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았다.

중요한 일이래두 그러네. 가서 기다려. 아니면 알아서 해결하던지.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치면서 고함을 질렀다. 아내가 움찔 놀라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한순간 부르르 떨었다는 것을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제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고함을 친 것이다, 아내에게. 그것도 섹스를 요구하는 아내에게 고함을…….

아내는 흠칫 놀라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핏기가 싹 가신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부로부터 엄습하는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나는 TV에서 풋밤을 보았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정지한 것만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내는 놀라움으로 반쯤 벌어진 입술에 떨리는 손을 갖다 대고 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뒷걸음질 쳐 서재를 나갔다. 나는 그녀가 등 뒤로 손을 더듬어 문의 손잡이를 찾은 후에 서재를 빠져나가는 동안 줄곧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더 이상 그녀에게 고함을 치거나 노려보거나 할 마음이 아니었으나 그 시선을 거두어들이기에는 나는 스스로에게 너무 놀라워하고 있었다.

침실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나고 한참 뒤에야 나는 내가 땀이 흐르는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 송수화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천히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쥐가 날 것만 같았다.

들켰어? 하고 그녀가 낮게 숨죽인, 그러나 약간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아직 그녀가 거기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직도 함부르크의 전화기 속에 있는 것이었다.

TV 때문이야. 풋밤 때문이라구…,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흥분을 억누르면서 목소리를 고를 때처럼 심하게 떨렸다.

위태로운 사람 목소리야. 어째서지?

난 늘 위태로웠어. 알잖아?

여린 밤송이가 달린 가지를 꺾어서 그녀는 소로의 부드러운 흙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에 널려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들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나뭇가지를 받아 들고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피-. 밤송이도 깔 줄 몰라?

그녀는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머쓱했으나 도리 없는 일이었다. 나는 도시의 슬럼에서 성장해서 도시의 슬럼에서 살아가는 핼쑥한 룸펜에 지나지 않았다. 밤송이를 나뭇가지로 까 보는 경험이란 내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 손에서 나뭇가지를 앗아갔다. 그리고 서툴기는 했지만 밤송이를 쿡쿡 찔러서 부드러운 부분을 열고 부끄러운 속살을 저희들끼리 맞부비고 있는 여린 풋밤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아직 껍질조차 생기지 않은 노란 빛깔의 알밤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미는 그것을 받아 그녀가 하는 대로 앞니로 살짝 깨물었다. 비릿한 날콩 냄새가 났고, 풀을 씹을 때처럼 상큼한 맛이 느껴졌다. 그 미각은 나의 뇌수를 적잖게 자극하였다.

높자란 밤나무 숲 위로 잘게 부서진 하늘은 무척 낮았다. 먼 국도로부터 들려오는 차량들의 질주음이 퍽 가까웠다. 소로변의 키 큰 풀잎들에는 벌써 촉촉이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우리는 걸어간 길을 되짚어 등성이를 넘었다. 물기를 머금은 대기 탓일까, 담채화 같은 개활지의 풍경이 눈에 촉촉하게 와 닿는다. 나는 등성이에서 개활지를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다가 그녀의 어깨를 돌려세우고 가볍게 입맞추었다. 엷은 풀냄새가 났다.

황록색의 벼 들판 위로 바람의 발자욱이 밟혔다. 그리고 뚜렷한 경계를 지으며 소방호스에서 뿜어지듯이 들판의 저편으로부터 소나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시야가 흐려지면서 뿌연 먼지 같은 것이 들판으로부터 피어올랐다.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우리는 비가 다가와, 지나갈 때까지 긴 입맞춤을 하였다.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은 뿌옇게 피어나는 수증기로 마치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걷는 것 같았다.

난, 너와 결혼하고 싶었어. 그건 아마 이성에 대해서 내가 최초로 갖게 된 적극적인 생각이었을 거야.

다 지나간 일인걸. 다시 반복하지마. 어찌 되었든 우리는 선택한 셈이야. 각자 다른 삶을.

난 선택한 적 없어. 내겐 선택의 기회조차 없었다구. 어느 날 네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을 뿐이야. 정말 말도 안 됐지.

당신이란 사람은…, 그래 뭘 선택할 줄 모르는 사람일 거야. 그냥 그대로 있지. 언제나 그냥 있을 뿐이야.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을까? … 아닐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언제나 그런 상태로 서로에게 질질 끌려서 삶을 소모해 나갔을 거야. 최소한 두 사람 중 하나는 결단을 내렸어야 했어. 그래서 난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거야.

하지만 올바른 결단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은 후회하고 있잖아, 지금.

난 후회한다고 말한 적 없어. 이따금 당신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난 후회한 적 없어. 그리고 난 남편에게 최선을 다해 왔어.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당신하구 이렇게 통화하고 있는 게 갑자기 혐오스러워졌어.

내 탓이 아니야. TV 때문이라구.

나는 비열한 어조로 말했다. 자, 이제는 전화를 끝내야 하는 시간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격렬한 감정으로? 순화된 감정으로? 완결된 화해로? 나는 아무래도 전화를 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극히 단순하여 마치 거짓말 같은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 혐오스러워졌어. 그게 그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윙-. 단속적인 신호음이 끊기고 나자 수화기로부터 전기적인 공명이 울려 나왔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공명음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서재의 어둠 전체에 완벽하게 공명되고 있었다.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나는 서재를 나왔다. 거실 바닥에는 넓은 창으로부터 흘러 들어온 은은한 달빛이 엎질러져 있었다. 나는 서재의 문에 등을 기대고 한동안 창 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문득 이 집안에서 아무 곳도 갈 데가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흑, 흐느끼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나는 그것이 내가 무의식적으로 낸 소리로 착각하였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가까스로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끝내 그 소리를 착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울음소리는 서러움이라든지 분노라든지 하는 감정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지극히 건조하고 무표정한, 온전히 울음이라는 생리작용만을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었다. 집안에 아내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므로 울음을 운 것은 아내가 분명했다. 나는 천천히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빛에 하얗게 물든 아내의 웅크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침실 문 앞에 알몸인 채로 쭈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아내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은 낯설고 기이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알몸은 퍽이나 육감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도 처녀와 같은 신선한 탄력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흐드득 떨리는 반달같이 하얀 어깨를 바라보며 대체 왜 울고 있는 것일까, 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내가 좀 추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넌 어째서 날 선택했지?

나는 계속 흐느껴 대는 소리가 성가셔서 조금은 뾰족한 음성으로 아내에게 물었다. 후, 하고 아내가 한숨을 토해 냈다. 울음을 진정시키려는 듯했다.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했었나? … 이를테면 말이야, 누구 하고 좋아지냈는데 결혼해 살기에는 좀 뭣했다, 그래서 그냥 뭐 그런 거…….

이젠 제발 그만해요. 제발 이 따위…….

아내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파랗게 인광을 발하고 있는 아내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아내의 두 눈에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읽을 수 없었다. 단지 길들였던 개에게 손가락을 물렸을 때처럼 적절한 배신감이 어려 있는 눈빛이었다.

이따위 놀음에 질린 건 바로 나야. 난 네 남편이고 싶다. 더 이상 사육당하는 수컷이 아니고 싶어.

흐응, 하고 아내는 몸을 일으키면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적잖은 비웃음이 배어 있었다. 어쩌면 울음 끝이어서인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하다가 아내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말끝이 부르르 떨렸다. 어둠이 눈에 익어 아내의 나체가 환하게 드러나 보였다. 언젠가 주방의 조리대에서 보았던 부패를 막기 위해 물에 담가 둔 두부가 연상되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아내의 말을 받아 그대로 되뇌었다.

그래,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능하다는 거야. 모든 것에 무능해.

섹스 하나만은 쓸 만하고?

흠, 그럴까? 고 아내는 팔짱을 끼었다.

벗은 아내는 어둠 속에서 두 배로 부풀어 보인다. 옷을 입은 나는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위축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그닥 소용에 닿는 몸짓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머리를 세차게 흔드는 데 그쳤다.

테레비에서 뭘 봤죠?

풋밤. 그녀의 풋밤을 보았어, 하고 나는 고분고분 대답하였다.

그랬을 거야…….

그뿐이야.

잠을 좀 자지 그래요. 서재에서 자도록 해요.

서재에서 자라고?

그래, 자고 나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거야, 전처럼.

전처럼 좋아진다고?

그래요, 전처럼.

아내는 커다랗고 하얀 엉덩이를 보이면서 침실로 들어간다. 그녀가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서재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는다. 함부르크에서 처남이 사다 준 전화기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다. TV에서 그녀의 풋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 전화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젠장, 자고 나면 전처럼 좋아질 것이다. 대체 전처럼 되는 것이 어떻게 좋은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번호를 돌린다. 짜르륵 짜르륵 다이얼이 돌아간다.

지금 거신 전화는 잘못 누른 번호이거나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십시오……영어 안내가 뒤따른다.

나는 어젯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TV에서 풋밤을 보았을 뿐이다. 단지 그녀의 풋밤을 보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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