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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12. 2019

TV 속의 그녀의 풋밤_02

단편소설집

나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침실에서 알몸으로 잠들어 있을 아내를 떠올리자 왜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언제나 알몸으로 잔다. 나는 아내의 옷을 벗겨 본 적이 없다.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누워서도 굳이 가슴이나 국부를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게 섹스를 요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난, 어릴 때부터 발가벗고 자 버릇해서 그래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 역시 스스로 팬티를 벗고 누운 아내는 삽입하려는 나를 밀치며 분명하게 말했다. 하고 싶을 땐 말할 테니까, 아무 때나 그러지 말아요. 성적인 흥분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싹 가시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거세된 수퇘지를 연상하였다. 아니, 거세되었으므로 수퇘지도 뭐도 아니다. 단지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아내의 성기는 그녀의 다른 부위, 이를테면 코나 손가락처럼 신체의 일부일 뿐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것은 은밀하게 숨겨져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건조하며 무표정하다. 불규칙한 멘스가 있을 때만 필요에 의해서 가려진다.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그녀가, 해줘요, 하고 말하면 그것은 젖어 있고 나를 향해, 아니 자극을 향해 열린다. 나는 자극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녀가 해줘요 라고 말하면 나의 성기는 조건반사를 하듯 발기한다. 그리고 삽입하고 기계적으로 자극하고 그녀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탄성을 발할 때까지 참았다가 사정을 한다. 불필요한 사정이다. 재빨리 아내는 그것을 씻어 낸다. 그것은 고름일 뿐이야. 아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충분히 동의를 표할 것이다. 그것은 고름에 다름 아니다. 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 몸이 망가지거든. 동창애들, 사우나에서 보면 정말 한심스러워. 축 늘어진 젖에 다가 뒤룩뒤룩한 허리며 똥배, 거기다가 시커멓게 벌어진…, 알아요? 아이는 여자로서는 사형선고야. 아내는 탄력 있는 자신의 유방으로부터 허리, 그리고 아랫배를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만족한 표정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네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어. 건강한 섹스, 하고 나는 속으로 말한다. 당신은 매력 있는 아내를 가진 행운아예요. 그래, 나도 아이 따윈 원하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닮을까봐 겁이나, 하는 뒷말은 삼킨다.

기왕이면 이쁜 여자였으면 하는 거야. 점잖빼니까 너답지 않아.

그녀의 말은 밝음을 가장한 듯하고 공허한 울림 같은 게 느껴졌다.

남편은 어때? 끔찍이 위해 주는 타입인가?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아내에 대한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남편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위여 버린 가슴속의 불잉걸이 희미한 바람에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잠자리? 하고 말한 그녀는 훅 하고 담배연기를 몰아서 뿜어내는 소리를 내었다.

짓궂어졌다. 나는 비로소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물고 라이터를 켰다. 까닭 없이 손이 부르르 떨렸다.

너보단 나은 편이야. 전엔 아주 좋았는데 요즘은, 요가라는 게 사람을 좀 마르게 했어야지. 이러다 이 사람 죽지 싶어서 내가 피하지. 하긴 난 그 방면엔 통 소질이 없으니까.

그녀의 말은 삼켰던 담배연기를 채 뱉어 내지 못한 나의 폐를 마리화나를 들여 마신 것처럼 부들부들 떨게 하였다. 나는 새벽 한 시 이십팔 분에 그녀가 전화를 받은 이래로 처음 이 통화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녀가 전화를 받으리라는 기대는 갖고 있지도 않았다. 나는 기대감을 갖지 않기로 소모되어진 시간과 묵계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저장된 전화번호가 실제로 살아 있는지조차 나는 의심하였다. 신호가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의아함을 느꼈더랬다. 하물며 그녀가 전화를 받으리라고는 나는 잠재적으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마치 박제된 고라니가 문득 소리 높여 울면서 숲 속으로 뛰어가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심정인 것이다. 그러한 때 아내와 나 사이의 기묘한 성생활을 연상하고 또한 그녀의 성생활을 화제로 올리다니, 이건 마치 중인환시에 흘레 붙고 있는 개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나를 환멸스럽게 했다.

십일 년만의 화제가 고작 섹스라니, 마땅찮아.

화났군. 화가 나면 꼭 그런 목소리가 돼. 하지만 말야 난 너하고 했던 기분, 이따금 떠올릴 때가 있어. 그걸 말하려고 했던 거 같아. 그래도 화가 난다면 할 수 없지만.

남편이 불쌍하군. 마누라가 옛날 놈팽이하고 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테니.

난 말해, 그런 거. 잠자리에서도 이따금 말하는 적이 있어.

이것이 모잠비크나 콩고로부터 사온 전화기라면 이런 말들은 흘러나오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전화기에 대해서 화가 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요기에 가까운 남자로군, 남편은. 정상이라면 그런 여편네를 데리고 살지 않아.

나는 갠지스의 흙탕물에 한 발로만 버티고 서서 몸을 뒤틀고 있는 그녀의 남편을 상상해 본다. 강바닥을 디디고 선 다리에는 최소한의 근육만이 붙어 있다. 나머지 한쪽 다리는 그의 뒷목을 감고 뒤꿈치를 귓바퀴에 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중얼거린다. 그 놈팽이와 좋았다는 얘길 들으면 난 더욱 마음이 가라앉아. 성욕 따위는 이미 내 의지에 간섭할 수 없어. 당신만 좋다면 그 놈팽이와 만나서 즐겨도 좋아. 당신만 좋다면……. 그리고서 그는 갠지스의 물을 손으로 떠서 목을 축인다.

요기라구? 감히 그 정도가 될까. 암튼 전해줄께, 돌아가면. 넌 뭘 하지? 네가 직장에 다니는 건 좀 상상하기 어렵다.

광고쟁이야. CF 제작. 기획부터 카피도 하구, 이따금 연출도 하구, 사실 난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나도 이상해. 얼굴 근육이 부자연스러운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말이야. 알지? CF모델들, 말할 때마다 윗니가 가지런히 드러나는 사람들 말이야. … 난, 단지 형식적으로 일할 뿐이야. 처가 쪽 계열사인데 광고업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데지. 그만큼 나는 처가에 빌붙어 사는 무능력한 인간으로 유명해.

이렇게 까지는 말할 것 없잖아, 하고 나는 제동을 걸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쾌감을 얻는 노출증 환자처럼 나의 생활을 줄줄이 엮어 풀어놓았다. 그러나 조금의 과장이나 축소도 없었다.

휘유, 재벌딸이로군. 상상이 안 가, 도저히. 어떻게 한 거지?

간단해. 아내가 날 선택했어. 다소곳한 게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들을 것 같았나봐. 틀리지 않았지. 난, 말 잘 듣는 남편이야. 말 잘 듣는 막대기…….

술 마시고, 취해서 한밤중에 전화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어. 알아? 지금 어떤 기분이 드는지? 어제 너를 만나고 돌아와서 긴 꿈을 꾸고 깨어서 전화를 받는 거 같아. 십일 년이라는 긴 꿈에서 막 깬 기분이라고.

어째서 그럴까? 네 말대로 난 술 마시고 한밤중에 불쑥 전화를 했지만, 전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모든 게…… 단지 뒤틀렸다는 느낌이 들어. 네가 거기 있는 거. 그 외엔 시간은 흘러갔다, 소모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어. 우린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 뿐이지.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자 그녀는 또다시 한숨 같은 호흡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부스럭 대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런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는 걸. 정말 모르겠어. 이런 얘기 주제넘게 들리겠지만,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들리겠지만 난 니가 결혼 같은 건 아주 안 하고 살 줄 알았어.

너도 하는 결혼인걸. 설마 내가 언제까지 독신으로 지내면서 널 그리워할 거라는 사치스러운 꿈을 꾼 건 아니겠지?

나는 조금 비꼬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말이 그렇게 나왔을 뿐이지 그녀를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내게는 그녀를 비난할 이유가 하등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거듭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조금쯤은. 하지만 그것보다도 결혼생활에 적응하며 산다는 거 네겐 어려우리라고 생각했어. 넌… 타인을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경향이 있거든. 그건 생을 살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가 돼.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기가 질리게 하고,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상대는 어떻게 메아리를 울려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빠지고 말거든. 그리고… 모든 게 어느 순간, 정체되지. 더 이상은 진전이 없는 거야.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비등점에 달한 상태라고나 할까. 그런 너는 상대를 아주 비극적인 행복감에 빠져들게 해.

비극적으로 행복했었어?

나는 무감동하고 무표정하게 물었다. 그녀의 말이 텅 빈 공동만 같은 내 가슴속에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려웠지. 언제까지나 기다림의 순간은 이어질 거라는 두려움이 나를 숨 막히게 했어. 서로에게 그건 불행이라고…, 난 판단했어.

넌, 선택을 했던 거야. 좀 속되게 말하자면 보다 안정되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를 선택해서 여유로운 삶을 찾고자 했던 거지. 그런데, 인도라니…….

날 비난할 자격이 네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넌 날 그저 내버려두고 있었어. 아무런 인생의 청사진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거짓으로라도 미래의 설계를 내게 펼쳐 보이지 않았어. 그저 틀어 박혀서 소설에만 매달리는 거, 그게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었을까? 난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그리고 단순한 인생을 원했어. 그러기엔 너무 치열하고 고통스럽고 무거운 사람이었어, 넌.

그건……. 그래, 변명 따윈 하지 않겠다. 그것은 너의 부재 때문이었다. 넌 왜 시간이 이렇게 지난 지금에도 솔직하지 않은 거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구? 그럴듯하지만 설득력이 없군. 차라리 가난이 두렵고 지겨워서 라고 말하는 게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감각적인 네 성향에는 내가 끌어안고 있는 가난이 머릿속의 상상만으로도 지긋지긋했을 테니까.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심한 요의를 느끼고 있었다. 갈증 때문에 입안은 바짝 말랐다. 방광에 오줌을 꽉 담은 채, 함부르크로부터 온 전화기의 수화기를 통해 지나간 시절의 오류를 서로의 탓으로 돌린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나는 허벅지를 꼭 조여서 오줌을 참으면서 발신의 동기를 상기하여야만 했다.

나는 TV에서 풋밤이 속살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만 것이었다.

우리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군.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가만히 서재 밖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침실의 문이 열리고 가벼운 발짝 소리가 들린 다음, 욕실 문이 열렸다가는 닫혔다. 그리고 조용한 밤이었으므로 아내가 변기에 세찬 오줌줄기를 내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부질없어. 난 사실 어떤 느낌이 강하게 들었더랬어. 어쩌면 네게서 전화가 걸려 올지도 모른다는, 좀 허황하게 들리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더랬지.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 저녁 어느 때쯤인 거 같아.

구르릉, 하고 욕실로부터 변기에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홉 시 뉴스를 봤지. 뉴스 따위는 보지 않는데, 왜냐하면 난 비정치적으로 살기로 마음먹었거든.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의식이 없는 인간으로 매도되는 세상이지만 까짓 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의야, 나는. 그런데 오늘 저녁엔 우연히 뉴스를 보았어. 아니 그저, TV를 바라보았던 거지. TV가 거기 있었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그만 풋밤을 보았어. 그 때문이야. 그래서 전화하게 된 거야. 이런 식으로 옛날에 니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따위를 입에 올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저 옛날의 전화번호를 누르게 되었던 거지. 그래야만 될 것 같은 강한 느낌, 아니 이건 느낌 하고는 다른 거다. 어떤 울림 같은 것이었지, 말하자면. 멀리 떨어진 미지의 곳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파장과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그런 거 말이야.

그랬었군. 나도 실은 그 뉴스를 보았어. 그래, 그 풋밤을 보았지. 울림……. 네 말이 맞아. 틀림없이 이건 울림에 의한 거야.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발짝 소리가 침실로 향하더니 방향을 틀어 서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내는 노크도 없이 문을 발칵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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