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ielC Jun 14. 2019

선인장 남자_01

단편소설집

*

오후 내내 매달렸던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전송 단추를 눌렀다. 문서 파일이 사내 통신망을 타고 부장의 컴퓨터로 전송되었다. 왼쪽 귀에서는 여전히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성가시게 굴던 끝이 뭉툭한 그 소리는 귀속을 파고들며 신경을 자극했다. 두통의 시작이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까만 점들이 황급히 흩어졌다. 그런 건 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껴지게 마련이다. 조용히 고개를 기울여 2,3밀리미터쯤 되는 갈색 점들을 내려다보았다. 개미 몇 마리가 설탕 부스러기 주변을 얼씬거리고 있었다. 티슈를 한 장 뽑아 들어 그것들을 치우려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잖아. 개미는 바퀴벌레 하곤 달라. 일개미들은 어차피 번식도 못하는 놈들인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것들을 문질러 닦아 버리는 대신에 볼을 잔뜩 부풀렸다가 훅, 하고 불어버렸다. 왼쪽 칸막이까지 날려간 개미들은 꼬물거리다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무실에 무슨 개미야?”


나는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관자놀이를 세게 짓누르면서 중얼거렸다. 두통이 머릿속을 자근자근 씹어대고 있었다. 뇌를 온통 갉아먹어 치우겠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모두 먹어치우고 나면 두통으로서의 역할도 끝장날 테니까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아마도 키득키득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장님, 휴게실 가는 길인데, 뭘 좀 드시겠어요?”


지나던 여직원이 내 얼굴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낯설고 먼 얼굴이었다.


“아... 그래요. 고마워요.”


여직원이 머뭇거렸다.


“어... 그냥 녹차나 뭐 그런 거... 정말 고마워요.”


“네에...”


여직원이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 사무실 약 언제 쳤지?”


“지난 화요일에요. 매달 5일, 사내 방역일이잖아요. 벌레 있어요?”


“음, 개미가 있어.”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고, 여직원은 아하, 개미! 하는 표정을 짓더니 돌아서 가 버렸다. 탁상용 달력을 보았지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었다.



*

5분쯤 지나서 문서를 인쇄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부장이 보고서를 검토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가 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머릿속에서 아주 오래되어 딱딱해진 식빵 조각 소리가 났다.


부장은 아직도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늘 바쁜 사람이었다.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아닌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아, 잠깐 기다리게!”


그의 말소리가 개미 소리처럼 아득했다. 외등 불빛으로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머릿속에 날 것들이 한가득 바글거리는 것 같았다. 무심코 귀에 손이 갔다. 예약 진료비까지 냈는데 병원에 가지 못했다. 예정에 없던 보고서를 만들어내라고 부장이 다급하게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내 업무인지 아니면 그의 업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는 늘 바쁘고, 덩달아서 나도 바쁘다. 


부장의 방은 언제나처럼 조용하다. 방음이 잘 된 방안에는 방금 전 진공청소기로 소리를 모두 빨아들인 것처럼 아무런 소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요(騷擾)는 오로지 내 귀와 머릿속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네?”


부장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뭐라고 입을 열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를 향해 몸을 숙여야 했다. 


“자네 때문에 내가 산다구! 이러니까 내가 부장단 미팅 나가면 큰소리 탕탕 치는 거잖아. 그나저나 왜 병원엔 안가? 아직도 귀가 아픈 거지?”


부장이 한 손을 확성기처럼 입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대관령을 넘고 난 뒤 하품을 한 것처럼 갑자기 귀가 뻑-, 하고 뚫렸다. 


“병가를 내서 집중 치료를 받아봐. 사람이 왜 그렇게 미련해?”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여기... 프린트한 보고서입니다. 첨부 사항을 메모해두었으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고마워. 이거 다 갈무리해뒀다가 갚는 거 알지? 허허.”


부장이 웃었다. 그는 얼굴 가죽만 움직여서 웃는 특이한 재주가 있다. 가죽 밑의 근육은 무슨 표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참, 제수씨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오려는데 부장이 느닷없이 물었다. 


“네?”


“우리 석인 엄마가 제수씨, 통 연락이 없다고 하데. 언제 부부동반으로 저녁이나 하지.”


다시 부장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언제든 부부동반 식사를 하자면 해야 하는 것이다. 따분하고 거북하지만 나쁠 것도 없다. 나는 목례를 하고 방을 나왔다.


책상 위에 녹차 한 잔과 단정하게 포장된 노란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다. 노란 장미라니...! 장미를 집어 들자 그 밑에 숨어 있던 접착 메모지가 보였다.


<진>에서 기다릴게요, 7시. k.


k라구? <진>이라는 데는 무슨 카페 같은 곳인가 보군. 하지만 도대체 누가 무슨 용건으로 만나자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사무실 안을 휘둘러보았다. 콘솔마다 퇴근을 준비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무표정하고 모두가 무관심하다. 나는 장미를 코끝에 갖다 댔다. 아무런 향기도 없었다. 갑자기 송곳 같은 게 귓속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장미를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휴지통 속에는 누르께하게 말라비틀어진 장미꽃이 몇 송이인가 더 처박혀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TV 속의 그녀의 풋밤_0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