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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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
두꺼운 벽 저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하얀 벽 저편으로부터 희끄무레한 윤곽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뭐라구?
“귀 좀 어떠냐구?”
벽이 사라지면서 목소리가 분명해졌다. 영업 3과의 조 과장이었다. 나는 그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뉴욕 지사에서 2년간 함께 근무하면서 단짝이 된 친구였다. 서른일곱, 나와 동갑이지만 그는 M자 형으로 이마가 벗어져서 마흔둘 쯤 되어 보였다.
“그저 그래.”
나는 왼쪽 귀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몇 번 꾹꾹 눌렀다. 두통은 소강상태였다. 귀에서 손을 떼자 생맥주집의 소음들이 와르륵 밀려들었다. 진동판이 찢어진 스피커처럼 소리들은 찍찍 갈라졌다.
“젊은 놈이 왜 그렇게 주접이냐? 여름엔 눈병이더니...”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내미는 잔에 건배했다. 맥주를 몇 모금 마시자 입에서 소주 냄새가 났다. 어디선가 소주로 1차를 하고 이곳에 온 모양이다. 조 과장이 주로 떠들었을 것이고 나는 주로 들었을 터인데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탁자에 놓인 핸드폰의 액정 화면을 슬며시 들여다보았다. 밤 열한 시였다.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있었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암튼 미리 축하한다. 인사과 최정호라고,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걔 말이니까 이건 확실한 거야. 그나저나 니네 박 부장 그 인간은...”
조 과장은 오징어포를 입술 밖으로 늘어뜨리고 질겅거리며 계속 떠들었다.
“그만 가야겠어.”
나는 핸드폰과 손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 야, 왜 이래, 이거? 겨우 이걸로 입 닦어?”
“알잖아, 귀가 아프다니까.”
“그러니까 알콜로 깨끗하게 청소해줘야지.”
그는 조끼에 반 넘게 남아 있는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면서 손짓으로 나를 제지했다.
“좋다, 나가자. 내가 3차 내지.”
말끔하게 비운 조끼를 탕, 하고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맥주집은 지하였다. 거리로 나서자 찬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들을 후려쳤다. 바람은 주파수가 어긋난 트랜지스터 라디오 소리를 냈다. 낙엽이 바짓단을 때렸다. 잔뜩 웅크린 사람들이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양복 깃을 올렸다. 막무가내로 3차를 가자던 조 과장이 오줌을 누기 위해 담벼락을 향해 돌아섰다. 나는 버스 정거장 쪽으로 걸어갔다. 아크릴 칸막이가 쳐진 승객 대기 부스에는 낙엽이 수북이 들어차 있었다. 좌석 버스가 곧 도착했고, 나는 조 과장 쪽을 힐끗 바라본 뒤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벽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토하고 나면 찬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갈 테지.
버스의 히터 열기에 엷은 구토를 느끼며 두 정거장을 지났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야, 어딨어?”
“버스 탔어. 그만 들어가봐.”
“어이, 너 정말 치사하게 이러기냐? 내가 쏜다니까 그러네. 빨랑 도루 와 임마.”
“버스라니까. 얼른 집에 가라.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얼어 죽겠다.”
그때 문득 노란 장미와 메모가 떠올랐다. 이 친구라면 혹시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말이야, 내가 노란색을 좋아하던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그게?”
“<진>이라고, 무슨 카페인지, 술집인지, 혹시 몰라?”
“뭐? <진>에 있다구? 그게 어디 붙은 건데...”
그가 뭐라고 더 떠들었는데 잡음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전화는 곧 끊어졌다. 잠시 기다렸다가 전원을 꺼 버렸다. 마실 걸 가져다주겠다던 그 여직원의 얼굴이 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장미와 메모를 남긴 K일까. 그런데 왜 그토록 낯선 얼굴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버스 안내 방송을 듣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