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ielC Jun 16. 2019

선인장 남자_03

단편소설집

*

갑자기 환한 불빛이 두터운 장막 저편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짧게 스타카토 되는 경적음은 조롱과 위협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기 일방입니까?”


“네?”


나는 빛을 외면하면서 옆에서 말을 걸어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감색 유니폼을 입은 택시 운전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일방통행이냐구요!”


“아...그게...”


앞쪽에서 불빛이 다시 번쩍였고 경적이 울렸다.


“알았어, 알았다구, 그 새끼하곤!”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욕을 내뱉으며 운전사는 차를 후진했다. 택시는 양쪽으로 차들이 가득 들어찬 좁은 길을 맹렬한 속도로 빠져나왔다. 모퉁이를 돌아 편의점 앞에 이르자 택시는 왈칵 멈춰섰다. 계속 상향등을 켠 채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승합차가 택시의 코끝을 스칠 듯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며 길게 경적을 울렸다.


“조금 걸어 들어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손님? 길이 좁아서 고생 좀 하겠는데요.”


나는 얼떨결에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는 파란 배기가스를 남기고 급하게 떠나 버렸다. 나는 편의점 앞에 우두커니 서서 <고향마을>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보았다. 고층 아파트가 검푸른 하늘에 시커멓게 솟아 있었다. 


제대로 왔군, 비로소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끝없이 미로를 헤매는 기분 나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잘못 탄 좌석버스에서 내려 4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했고, 택시를 두 번인가 갈아탔던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은 흔적만 희미한 화석 같았다. 하지만, 이따금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커피를 마시곤 하는 이 편의점만큼은 확실했다. 주차된 차들로 몸살을 앓은 진입로도 그랬다. 나는 확실히 돌아온 것이었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타일 바닥에 물기가 반짝거렸고, 아카시아 향의 탈취제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잡지 코너에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갈색 니트 스웨터에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약간 처진 크고 검은 두 눈이 무척 낯익은 인상이었다. 여자의 시선은 곧바로 책으로 돌아갔지만 그녀도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인사를 나눌만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카운터로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녹색 유니폼을 입은 편의점 직원이 종이컵에 원두커피를 가득 따라주었다. 


“인심이 넉넉하네요.”


“아저씨는 늘 더블이잖아요.”


앳된 여직원이 상냥하게 웃자 가지런한 이가 하얗게 드러났다.


“고마워요.”


커피 값을 지불하고 시간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찾았다.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핸드폰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손가방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뭘 잃어버리셨어요?”


“그런 거 같네요. 전화랑 가방이랑...”


“택시에 두고 내리신 거 아니에요? 방금 내린 택시에요.”


나는 이마를 탁 쳤다. 하지만 그 택시에 두고 내렸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일신운수였던 거 같아요. 일신통운인가?”


“택시 회사? 그런 걸 다 봐요?”


“네에, 그냥 보게 됐어요. 조금 전에 문 앞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거든요.”


여직원이 문 쪽을 가리켰고, 잡지를 보던 여자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신운수겠네. 보통 택시 회사들은 그런 이름 아닌가?”


“그럴 거에요. 집에 가셔서 얼른 핸드폰 통화 정지 신청하구요, 택시 회사에 전화해보세요.”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과 가방을 잃어버린 쪽이 오히려 편의점 직원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얼마 전에 꽤 고생했거든요.”


그녀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커피를 반쯤 마시고 나서 편의점을 나왔다. 


잡지를 뒤적거리던 긴 생머리 여자가 아파트 진입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외등 불빛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가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진입로에 내 구둣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만큼 앞에서 여자가 힐끗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도 그녀의 하얀 얼굴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는 벌써 미지근했다. 여자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발걸음이 한결 빨라져 있었다. 밤거리에서 이렇게 걷고 있노라면 꽤 거북해진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뿐인데도 앞서 걷고 있는 상대에게는 위협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105동 쪽 경비실 앞을 지나 단지로 들어섰다. 경비원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실의 벽시계를 보니 열두 시 삼십 분이었다. 길거리에서 오래 헤맨 건 아니었다. 여자가 104동 모퉁이를 막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힐끗 내 쪽을 바라본 것 같았다.


안심해. 난 나쁜 사람이 아니거든. 경비실 옆, 분리수거함에 커피 잔을 구겨 넣고 104동 모퉁이를 돌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올라가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그대로 몇 시간쯤 자고 나면 온몸의 노폐물이 다 빠져나가 내일 아침에는 드라이클리닝한 양복처럼 산뜻한 기분이 될 것 같았다.


<고향마을> 아파트, 103동 2003호. 머릿속에 내가 살고 있는 동호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103동 두 번째 라인을 향해 걸어갔다. 경비 장치가 된 현관 앞에서 여자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있었다. 나는 5미터쯤 뒤에서 걸음을 늦추고 헛기침을 했다. 두터운 유리문이 열리자 여자는 재빨리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추위 때문인지 일그러져 보였다. 자동문이 닫히자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는 내 순서였다. 나는 현관으로 걸어가 경비 장치 앞에 섰다. 왼쪽에는 스피커가 달려 있고 오른쪽에는 카메라와 숫자 패드가 배치되어 있다. 


4305를 입력하고 별표를 눌렀다. 


-올바른 암호가 아닙니다. 다시 입력해 주세요.


스피커를 통해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현관 안쪽의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초조한 듯 팔짱을 끼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4305*. 다시 입력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4305가 아닌 모양이었다. 4035*을 눌러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잘못되었다는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춥고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다. 최첨단 경비 시스템도 좋지만 이럴 땐 정말이지 귀찮기 짝이 없다. 나는 유리문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좀 열어주시겠어요?


나는 입만 벙긋거려서 여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가 이쪽으로 걸어와주기만 하면 센서가 작동해서 문이 열리도록 되어 있다. 아파트에 사는 어린아이들은 이게 재미있어서 말하지 않아도 쪼르륵 달려와 문을 열어주곤 했다. 그러나 여자는 편의점에서와는 전혀 딴판인 냉정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볼 뿐이었다. 


-비밀번호가 틀리데요. 좀 열어주세요.


나는 과장된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여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외면했고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날 알잖아. 아까도 아는 체했잖아. 속으로만 그렇게 외쳤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넌 누구야?


그녀의 크고 검은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냉정한 사람 같으니라구. 25층 아파트의 한 라인에는 모두 50가구가 입주해 있다. 이렇게 살다 보면 엘리베이터에서 종종 마주치게 되고 저절로 낯을 익히게 마련이다. 얼마쯤 살다 보면 어색해서라도 먼저 눈인사를 하거나 가벼운 안부를 주고받게 된다. 저 여자도 필경 그랬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어째서 나를 모른 체하는 것일까? 내가 너무 취해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경비 장치에 호수를 입력하고 호출 단추를 눌렀다. 이 현관문은 집안에서 인터폰으로 열어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벨이 울렸다. 다섯 번, 열 번... 거듭될수록 벨 소리는 점점 요란해지는 것 같았다.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 단조로운 벨 소리가 울러 퍼졌다. 스무 번까지 기다린 다음, 취소 단추를 눌렀다. 


아내는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애들도 꿈나라에서 한창일 시간이었다. 사람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이건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과장하고 3차나 할 걸 공연히 서둘러 돌아왔군. 하긴, 가족들 걱정에 서두른 것도 아니었다. 단지 조용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으니 전화로 아내를 깨울 수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운 다음, 암호를 다르게 조합해서 몇 차례 입력해보고 인터폰 호출을 다시 한번 시도했다.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아랫배가 탱탱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요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인장 남자_0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