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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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었다. 경비실 호출 단추를 눌렀다. 이것마저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아무 데나 급한 볼일을 해결할 참이었다.
“네, 경비실입니다.”
“103동 사는 주민인데요, 암호 입력이 자꾸 틀리다고 나와서요.”
“그래요? 암호가 뭔데요?”
경비원은 느긋했다.
“4305요.”
“그거 그전 거네. 보름 전에 바뀌었잖아요. 새로 바뀐 거 모르세요?”
“바뀌었다구요? 난 몰랐는데... 그럼 바뀐 걸 가르쳐줘요.”
“그건 안됩니다. 아시겠지만 입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인터폰으로 아주머니한테 열어달라고 하세요.”
“그게... 안되니까 경비실에 호출한 거잖아요... 이봐요! 내가 뭐 도둑놈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나 103동 2003호 사는 주민이라구요. 빨리 가르쳐줘요!”
나는 스피커에 대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오줌이 당장이라도 흘러나올 것 같았다. 허리를 엉거주춤하게 빼고 두 다리를 조여 보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 그거 참... 알겠습니다. 거기 가만 계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딸깍. 스피커가 꺼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돌아서서 재빨리 화단 옆 향나무를 향해 지퍼를 열었다. 향나무 밑동을 향해 오줌 줄기가 요란하게 뻗어나갔다. 2차로 생맥주를 마신 탓이었다. 오줌은 기이할 정도로 오랫동안 나왔다. 환한 전조등 불빛과 함께 등 뒤에 자동차 한 대가 와서 멈춰 섰지만 나는 볼일을 마치지 못하고 난감한 자세로 서 있었다. 자동차 불빛에 다리 사이가 환하게 드러났다. 누군가 내리고 차는 곧 떠났다. 또각또각, 가느다란 굽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미적미적 돌아서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낯익은 40대 여자였다. 그녀도 나와 같은 라인에 사는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민망했던지 알은체를 하지 않고 경비 장치에 재빨리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이제까지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던 현관문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시원하게 열렸다. 여자 뒤에 1미터쯤 떨어져 있던 나는 몸을 날리듯이 움직여 그녀를 뒤따라 들어갔다.
“어이, 이봐요, 잠깐!”
고함소리가 들렸다. 랜턴 불빛을 어지럽게 흔들며 경비원이 달려왔다. 현관문은 아직도 열린 채였다.
“이리 나와보세요.”
“아, 됐어요. 이제 들어왔으니까 됐다구요. 이웃이거든요. 그렇죠?”
나는 경비원에게 손을 내저으며 옆에 서 있는 여자의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여자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경비원을 향해 분명히 두 번, 고개를 저었다.
“이리 나오라구요.”
경비원이 내 팔을 와락 잡아끌었다. 40대 후반의 덩치 큰 그 남자의 완력은 대단했다. 나는 속절없이 그에게 이끌려 다시 현관 밖으로 나왔고 마법이 풀린 현관문은 스르르 닫히고 말았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돌아섰다.
“몇 호에 산다구요?”
경비원이 렌턴으로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2003호라니까요. 됐다는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웃이 아니라잖아요, 저 여자분이.”
“저 여자가 여기 입주자라는 증거 있습니까?”
조금 억지스러웠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내가 압니다. 저분은 2404호에 살아요. 하지만, 아저씨는 통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경비원의 렌턴 불빛이 이번에는 발치부터 차근차근 훑으며 올라왔다. 구두코에 오줌과 흙이 튀어 있는 게 보였다.
“방금 전에 저기다 방뇨했지요?”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나이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권한과 권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우월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 워낙 급해서...”
“잠깐 경비실로 가십시다.”
경비원의 억센 손이 내 팔을 꼼짝 못 하게 붙들었다.
“이거 놔요. 놓고 얘기하자구요. 세상에 입주민한테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조용히 하세요. 아직 아저씨가 여기 산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자꾸 시끄럽게 굴면 경찰을 부를 겁니다.”
경비원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나를 윽박질렀다.
“무단 침입에 노상 방뇨, 음주 소란이란 말이에요. 조용히 합시다.”
경비원은 내 귀에 입을 바짝 들이대더니 나지막이 지껄였다. 그것은 재판정의 망치 소리처럼 이상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나는 풀이 죽어 소처럼 경비원을 따라 걸어갔다.
두 평 남짓한 경비실에는 전기난로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경비원은 자신의 의자에 앉은 뒤, 펜을 집어 들었다. 나는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아저씨, 이름 어떻게 돼요?”
독직으로 옷을 벗은 전직 형사거나 퇴직한 직업 군인인 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취조 자세는 자연스러웠다.
“주민등록번호는?”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황당한 상황이라 얼른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머뭇거리자 경비원은 내 얼굴을 빤히 쏘아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전기난로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저씨, 신분을 확실히 확인해야 문을 열어드릴 거 아니요? 주민-등록-번호 몰라요?”
“650..., 좀 갑작스러워서 생각이 안 나요. 왜 이러지?”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주민등록증이라도 보여줘요. 거기에 주소 게재되어 있으니까 확인만 되면...”
“잃어버렸어요. 핸드폰하고 손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날도 춥고 한데 적당히 좀 마시지...”
경비원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인터폰 수화기를 집어 들고 메모지에 적힌 동호수를 눌렀다.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던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모두 자나 봅니다.”
경비원은 혀를 쯧쯧 차더니 캐비닛에서 서류철을 끄집어냈다. 겉장에 103동 입주자 차량 등록 번호라고 깔끔하게 쓰여 있었다.
“차 남바가 어떻게 돼요? 차 있으시죠?”
“회사에 두고 왔어요. 술을 마셔서.”
“그러니까 차 남바, 번호가 뭐냐구요...주민등록번호도 모르고 집 인터폰도 안 받고 차 번호도 몰라?”
경비원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고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악몽 속처럼 아무런 생각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또 모른다는 거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철에서 특정한 부분을 손가락을 톡톡 짚으면서 경비원이 재촉했다. 내 차 번호와 대조해서 맞아떨어지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서류철을 기웃거렸다. 비굴한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어서 집에 돌아가 욕조에 들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경비원은 딱, 소리 나게 서류철을 덮어 버렸다. 서늘한 기류가 얼굴에 닿았다.
“내가 오늘 밤 경비반장이야. 막내 동생뻘 되는 것 같아서 충고하는데, 또 얼씬거리고 주접떨면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될 거야.”
벌떡 일어선 경비원이 으르렁거렸다.
“네?”
“꺼지라구!”
나는 튕겨지듯 경비실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병든 소처럼 <고향마을>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