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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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사람이죠? 그렇죠?”
그녀의 흰 이는 박하 맛이 날 것 같았다. 녹색 유니폼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카운터 위에 놓인 핸드폰을 빙빙 돌리며 커피를 마셨다.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도 드물잖아요. 제가 오버한 건 아니죠?”
“전혀.”
오한은 어느 정도 가셨고, 이명과 두통도 잦아들고 있었다.
내가 편의점을 떠나자마자 택시가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핸드폰과 손가방을 돌려주기 위해서 돌아온 택시를 편의점 여직원이 알아보았고, 그녀는 나를 대신해 운전사에게 2만 원의 사례비를 지불했다. 나는 그녀에게 2만 원을 갚았다. 이제 경비원과의 황당한 시비도 가려질 것이고 집에 가서 쉴 수도 있을 것이었다. 손지갑에는 내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이 정도면 나를 증명하고도 남을 것이다. 경비원은 이제 나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사과를 해야 할 일만 남은 셈이다.
“근데 말이죠, 사람의 기억이란 게 우습잖아요.”
“뭐가요?”
“청아교통이었어요, 택시 회사 이름 말이에요. 전혀 아니잖아요, 아까 생각했던 거하고는.”
“그러네.”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학생인 거 같은데 뭘 전공하죠?”
“심리학이요. 따분한 거죠, 뭐. 아직 학부생이에요.”
짧은 커트 머리에 뭉툭한 콧날, 그리고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을 가진 그녀는 중성적인 이미지였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열만 아니라면 몇 번을 봐도 전혀 기억할 수 없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심리학이라 재밌을 거 같은데... 어쨌든 그쪽 아니었으면 아주 낭패를 볼 뻔했어요. 언제 시간 되면 알려줘요. 한 번 대접하고 싶으니까. 나, 아주 착하지는 않지만 껌껌한 생각 같은 건 안 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안심하고...”
내 말에 그녀는 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핸드폰의 단축 버튼을 눌러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가 아홉 번 간 뒤, 자동응답기가 전화를 받았다. 응답기에 내장된 여자 목소리는 경비 장치의 그것과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안 받아요?”
“안 받네.”
벌써 새벽 두 시였다.
“아줌마 핸드폰으로 해보세요, 그럼.”
아내의 핸드폰 단축 번호는 기억나지 않았다. 전화번호부를 검색하자 8번에 아내의 전화번호가 들어 있었다. 집은 1번이고 아내는 8번이었다. 번호 사이의 거리가 이상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8번을 길게 눌렀다. 이번에도 지루할 정도로 신호가 갔고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 메시지를 남기라는 안내가 나왔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양이네. 왜 떠메 가도 모르는 사람 있잖아요.”
나는 근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버린 여직원에게 대수롭잖은 듯 말했다.
“저도 그런 편이었는데요, 바꿨어요. 밤에 책도 좀 보고 조용히 생각도 정리하고 그럴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러기에는 이런 아르바이트가 딱이거든요.”
“집사람도 아르바이트를 해야겠구만. 그나저나, 심리학에서 이런 걸 공부하는지 모르겠는데, 좀 그냥 궁금해서...”
그녀가 지혜로운 쥐처럼 작은 눈을 반짝거렸다.
“왜 기억이 오락가락하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늘 같은 경우인데, 주민등록번호나 현관 암호, 차 번호판 뭐 이런 게 통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경비 말로는 보름 전에 암호가 바뀌었다는데 나는 그런 걸 전혀 몰랐거든. 그럼 지난 보름 동안 어떻게 드나든 걸까? 왜 그동안 한 번도 황당한 일을 겪지 않은 거지?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에요. 사무실에서도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누군가 꽃과 메모를 남겨놓았는데 그게 누군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거야. 이니셜이 K였는데 그런 건 보통 친밀한 사이에 사용하잖아요. 하지만 난 그게 김인지 강인지 구인지 짐작도 못하겠어. 그냥 막연히 여자겠거니 생각만 들고....”
말을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직원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심리학과 학부생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심리학에선 그런 거 다루지 않아요. 그냥 어디서 읽은 건데 외상 후 부분 기억상실이라는 거, 아저씨 증세랑 비슷한 데가 있는 거 같네요. 뭐라더라.... 음, 해리성 기억상실이라는 건데, 어떤 원인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으면 특정한 기억이 싹 지워져 버린데요. 원인이란 게 외적인 것도 내적인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증상은, 잠깐 동안인 경우도 있고 아주 오래가는 경우도 있구요.”
그녀는 온열기 위에 놓인 커피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작은 종이컵에 따라 잘근잘근 씹듯이 마셨다.
“그럼 심각한 거군.”
“음, 제 생각인데요, 그냥 과로한 데다가 과음하신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다시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꺼칠한 턱을 쓸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편의점을 나서려는 데 잡지 코너 반대편에 진열된 작은 화분들이 눈길을 끌었다. 파스텔톤의 작은 화분에 녹색과 붉은색의 앙증맞은 선인장들이 담겨 있었다.
“이런 것도 파네?”
막대형 녹색 선인장에 붉은색 둥근 선인장이 올려진 게 그중 마음에 들었다.
“접붙인 건 잘 죽지 않나?”
“모르겠어요. 사 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걸요.”
나는 화분을 들고 카운터에 돌아가 계산했다.
“선물이니까 잘 키워봐요.”
그녀가 뜻밖이라는 듯 깜짝 놀라며 화분을 받아 들었다. 녹색 유니폼과 그 화분은 제법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