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잔째 옥수수차를 따라서 천천히 마신다. 연령을 불구하고 죽은 자는 살아있는 자의 가슴에 어느 정도의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건너편 아파트에서 추락사한 아이가 내 가슴에 만들어 놓은 빈자리는 과연 어느 만큼의 넓이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나는 여름의 중심부와 같은 열기의 도가니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것은 나의 작업실이다. 아마 나는 한참 동안을 미친 듯이 서랍이며 책장들을 뒤졌던 모양이다. 끊겠다고 선언한 게 바로 오늘 아침이다. 아내는 사다 두었던 담배와 라이터, 재떨이 등을 내 방에서 깨끗이 치워 버렸다. 그녀는 학원에 출근하고 없다. 나는 안방으로 가서 아내의 화장대 서랍들을 모두 뽑아버리고 내용물들을 휘젓는다. 야말을 넣어두는 장롱 서랍 바닥에서 가까스로 담배를 찾아낸다.
나는 무섬증을 느껴 빈집으로부터 재빨리 뛰쳐나가는 아이처럼 집을 나선다. 5층 집으로부터 아파트 현관까지 내려오는 동안 계단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이 계단이 한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 두려움은 계단의 형상을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변형시켰으며 나를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이끌어간다. 어느 한순간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화르륵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 속에서 꿈틀대는 어떤 끔찍한 영상이 나를 그 환영 밖으로 순식간에 튕겨 내 보냈기 때문에 나는 비칠대며 현관의 우편함에 손을 짚는다. 아마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집을 나선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학생 시절의 중반 이후로 내가 언제나 취해온 관성에 몸과 정신을 맡겨버리는 삶의 태도에 기인한다. 관성은 내 삶에 있어서 일종의 추동력으로서 작용한다. 나는 그 나아가는 힘에 대하여 거슬리거나 저항할 의사가 전혀 없다. 그럴 준비조차 가지려고 시도한 적도 없다.
현관 계단에 슬그머니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대체 나를 집 밖으로 불러낸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 생각해본다. 그 힘의 의지는 무엇인가? 오늘 오후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지긋지긋한 여름의 한 때였고 나는 원고보다는 등허리와 팔뚝에 배어나는 성가신 땀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금 열흘 전의 그 추락사고를 떠올린 것은 비슷한 시간, 비슷한 광량, 비슷한 온도와 습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금 뭉뚱그리자면 그것은 시간의 일치 때문이다. 나는 마치 그날 탐문 경찰관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나오던 느낌을 온전히 재현하는 것 같다.
이제 다음 순서는 아파트 건물을 돌아가서 건너편 아파트 앞에 서는 것이다. 무엇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돌아가 보면 어떤 예상치 못한 일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화단에 꽁초를 던져버리고 천천히 일어난다. 215호에 사는 계집아이가 자전거를 올려달라고 해서 잠깐 지체된다. 이 아파트의 아이들은 그런 부탁쯤은 일상적으로 해댄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의 아이들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계단을 내려서서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죽 늘어선 아파트 건물들을 따라 창백한 횟빛으로 누워 있는 콘크리트 길을 걸어간다. 내가 건너편 아파트로 찾아가려는 이유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길이 막막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다만 나의 느낌에 기대어 보면 조금 전 작업실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을 때 방충망을 통해 건너다 보였던 그 집의 텅 빈 창, 사산한 자궁을 연상시키는 그 어둑신한 공동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아니다, 이제서야 나는 그렇게 느낌을 정리해낸 것이다.
열린 창은 사람의 흔적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 집에는 지금 누가 있을까? 아마도 그 추락한 아이의 엄마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고, 어쩌면 친척 중 누가 집을 지키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단지 그 집으로 가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와 만나려는 것인가? 그리고 누군가와 만나려 한다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혹은 그 누군가가 내게 들려줄 어떤 말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내가 다가가는 상황이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에 불과하며, 그러니 무성한 추측도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