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번 글쓰기
할아버지 대신 남은 카메라
취직을 할 즈음, 할아버지께서 치매를 앓기 시작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중에 화장실을 가시다 넘어지셨고, 고관절 골절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금방 퇴원하실 줄 알았지만, 결국 돌아가시기까지 2년을 요양병원에서 보내셨다. 그사이 외갓집에는 할아버지의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먼지만 쌓여갔다. 그중, 장롱 한편에 놓인 검은 인조가죽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카메라였다. 케이스를 열어보니 낡은 필름카메라 한 대가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이었다. 사실 가족 중 누구도 이 카메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는 그걸 챙겼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이 카메라로 단 한 장도 찍지 않았다. 그 사실이 뒤늦게 마음을 아리게 했다. 할아버지를 담아두지 못한 카메라. 이제는 그 빈자리를 더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필름이라는 타임루프
필름을 구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필름을 파는 곳이 드물었고, 온라인에서는 대량으로만 판매했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몇 달을 망설이다가 결국 필름 열 통을 샀다. 금방 다 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 통을 채우는 데도 오래 걸렸다. 사진을 남길 필요가 없어진 시대였다. 스마트폰이 모든 걸 대신했으니까. 그래도 부모님 생신이나 여행을 갈 때면 필름카메라를 챙겼다. 한 번에 한 통을 다 쓰진 못해도, 필름을 다 채우고 나서 인화된 사진을 보면 순간들이 새삼 선명해졌다. 마치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때로는 그것이 일종의 타임루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필름카메라 수리는 남대문
오랫동안 사용하던 카메라는 결국 고장이 났다. 버릴 수는 없었다. 대신 대체할 똑딱이 필름카메라를 찾았다. 검색 끝에 미놀타 카피오스25를 구했다. 둥근 외관이 마음에 들었다. 할아버지의 카메라인 케녹스는 너무 투박했으니까. 하지만 1년 만에 카피오스가 고장 나버렸다. 이참에 할아버지의 카메라도 함께 수리하려 했지만, 필름카메라를 고치는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충무로까지 찾아갔지만, 똑딱이 필카는 수리하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남대문의 한 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수리 기사는 말했다. "카피오스는 부품이 없어요. 앞으로도 사지 않는 게 좋아요." 대신 할아버지의 카메라는 부품도 있고, 수리도 어렵지 않았다. 일주일만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예상 밖의 전개였다. 다시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결국 나는 할아버지의 필름카메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기억을 현상하는 일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리게 된다. 돌아가신 지 5년이 넘었지만, 실루엣은 여전히 아른거린다. 이 카메라로 찍은 필름이 이제 서른 통 가까이 된다. 하지만 제대로 나온 사진은 열 장도 채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쓸 생각이다. 부모님의 생신, 아내와의 데이트, 아이가 뛰노는 거실. 평범한 순간들을 담아두고 싶다.
어린 시절 사진첩을 넘기다 보면, 언제 어디서 찍은 건지 모를 사진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사진들이 더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보며 피식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필름카메라는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나에게 할아버지를 현상하는 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