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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ypho Feb 09. 2021

#34. 남한산성

101번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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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랫만의 등산


새로운 경쟁PT로 경황이 없더 와중이었지만 억지로 시간을 빼 주말에 대학동기와 등산을 가기로 했다. 초등학교 때 홈스테이로 성남을 간적 있는데, 그 때 이후로 오랫만에 남한산성을 찾았다. 그 때는 차를 타고 남한산성 근처를 산책한 수준이었는데, 이번에는 5호선 마천역에서 출발해 남한산성 서문으로 가는 등반코스였다. 등산로 입구에는 약재상, 막걸리집 등 흔히 5060세대가 즐겨찾을 법한 가게들이 있었다. 근데 그 중에서 연남동 쯤에나 어울릴 것 같은 심플한 카페가 눈에 띠어 친구랑 따뜻한 라떼를 하나씩 들고 등산을 시작했다.


여느 등산로 초입이 그렇듯 등산로를 우습게 보게 하는 평탄한 길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걸음을 옮기니 생각보다 가파른 경사로가 있었고, 높고 낮음이 예상 되었던 경사로는 남한산성 서문에 다다를 때까지 높음만을 유지했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였는데 온몸에서 땀이 나서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등산로에서 판단한 만만함의 수준을 초월한 하이레벨의 경사로였다. 중간 중간 쉼을 가지면서 페이스 조절을 했다. 예전 만큼의 운동량이 없다보니 하루 등산만으로 몇일이 고달파 질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가파른 경사로의 끝에는 도착지가 있었다. 사실 이것이 등산의 묘미인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끝이 있다는 결론. 어떤 무서운 영화도 결국 주인공은 살아 희망을 준다는 뻔한 결론의 영화 같았다.


서문에 도착하니 절벽 위에 만든 쉼터가 있었다. 날이 좋지 않아 시야가 탁 트이지는 않았지만 지근거리의 롯데타워는 물론이고, 거리가 있는 남산타워까지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인조뷰 구나!"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대군을 피해 도성에서 그나마 피신한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그나마'

그런데 가파른 경사길로 오르고 보니 '그나마' 남한산성이 절대로 아니었다. 상상해보자. 온몸에 군복과 헬멧, 병기를 손에 쥐고 이런 경사길을 오를 수 있는지. 절대로 쉽지 않고, 왠만한 운동량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더군다나 당시에는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지금처럼 개량 되지도 않았을텐데. 그리고 겨울이었고.


인조가 다다랐던 남한산성이 생각보다 천혜의 요새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번 등산과는 별개이지만, 내가 사는 삼전동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유명한 삼전도 인근지역이라고 한다. 석촌호수를 걷다보면 '삼전도의 유래'라는 커다란 비석이 있다. 그러고 보면 동네 이름 진짜 막짓는다 싶기도..


아무튼 남한산성에서 본 인조뷰를 통해서 위급한 상황에서의 의사결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다. 쉽지도, 옳은 결정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기 힘든 것이 첫째 문제이고, 위급한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옵션의 폭도 넓지 못한 것이 두번째 문제 인 것 같다.


광고회사 생활을 오래하다보면 의사결정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재촉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마다 인조의 쩔쩔맴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인조 같은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것 같다.


설연휴를 맞이하는 이시점에서 연휴기간 별다른 이슈가 발생하지 않게 일을 잘 조율해 놓으니 뿌듯하기도 하고 그간의 의사결정이 합리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뿌듯하고 만족스럽다. 다음에는 행주산성으로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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