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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Feb 06. 2022

미국에서 일하기

서문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것은 젊은 시절부터의 오랜 꿈이었다. 꽤 신산하게 보낸 어린 시절은, 좀 다른 환경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힘든 집안 환경에서도 어찌어찌해서 대학 진학까지 하게 되었다. 없는 돈을 쥐어짜서 다닌 대학 첫해의 나 자신에게 많은 실망을 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는데, 신체 건강하고 키도 커서 특수 부대에 배치받았다.

 

군대 생활은 힘들었다. 매일매일 눈뜨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설렁설렁 거저 되는 일은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일상이었고 부당한 일을 겪어도 하소연을 받아줄 곳도 없었다. 20년을 힘들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군대에 가서야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삶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제대하고 복학한 후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여전히 돈은 없고 매 학기 등록금을 걱정하는 처지였지만 공부가 재미있었다. 스스로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배우는 모든 과목을 똑같이 좋아한 것도 아니지만, 대학생이라는 신분으로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고마웠고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성적도 잘 나왔고 전공과목에 흥미도 있었으니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대학원을 진학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계속 이렇게 부모님 도움을 받으면서 살 수는 없었다. 밑의 두 여동생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이미 직장에 다니는 상황에서 장남으로서 누리는 지원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내가 스스로 돈을 벌어서 유학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비디오방에서 봤던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일 수도 있고, 좋아하면서 공부했던 전공과목의 교과서 저자들이 전부 미국의 유명 대학 교수님들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졸업하던 당시 삼성이나 LG, 대우 같은 대기업의 신입 사원 연봉이 1,500만 원도 채 되지 않던 시절에, 첫해 연봉을 2,000만 원을 주는 외국인 회사가 있었다. 그 회사에 다니던 선배가 있어서 반도체 장비 관련한 기술 지원 업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입사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무슨 업무인지 알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돈만 보고 지원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는 회사에 다니면 몇 년만 열심히 일해도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졸업도 하기 전인 1월부터 출근했는데 4월에 신입 사원 연수를 미국으로 한 달 반 동안 보내주었다. 아직도 생전 처음으로 밟아본 외국 땅인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그 특유의 냄새, 그리고 공항 바깥으로 빠져나왔을 때의 눈 부신 햇살이 눈에 생생하다. 면허 딴지 몇 달 되지 않은 초보 운전자 주제에 3천 CC가 넘는 대형 렌터카를 몰고, 공항에서 실리콘 밸리의 101번 고속도로를 따라서 조심조심 운전하던 그 느낌, 그리고 회사 근처로 와서 처음 먹어본 버거킹 햄버거와 어마어마한 양의 라지(Large) 사이즈 코카콜라가 떠오른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고 달랐다. 그래, 바로 이게 내가 꿈꾸던 나라 미국이었다!


한 달 반의 꿈같던 미국 연수를 마치고 수원 지사로 발령받아서 시작한 실제 업무는 영 재미가 없었다. 몸이 힘든 것도 있지만, 도대체 일하는데 재미가 없었다. 반년이 지나고 사표를 냈는데 당시 사수였던 선배가 조언해주기를, 처음이 힘들지 이 고비만 넘기면 다닐 만할 거라고 해서 2년을 다녔는데 결국 그만두었다. 2년을 모은 돈으로, 당시 박사과정에 진학한 동기가 있는 학교 실험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서 빈둥거리다가 가을에 또 다른 외국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 회사도 무슨 일인지 잘 알고 간 것은 아니었다. 친하게 지내는 동기 녀석 추천으로, 내가 재미있어하는 소프트웨어 관련 회사라고 해서 지원했고, 덜컥 입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일은 정말 재미있었고, 연봉도 먼저 다니던 회사보다도 더 받게 되었다. 사무실도 강남 한복판에 있었고, 주변 사무실 사람들과도 친해지면서, 결국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결혼도 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아침에 눈을 떠서 회사 가는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주말에도 출근해보면, 지사장님도 나와계셔서, 서로 어쩔 수 없는 일 중독이라고 한바탕 웃고 나서는,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삼겹살에 소주를 한잔하는 그런 나날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그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20년을 일했고, 결국 미국 사무실로 발령받게 되었다. 미국 오는 것이 확정된 후에, 집사람에게 우스갯소리로, '거봐 간절히 원하면 꿈이 이루어지잖아'라고 했더니 마주 웃어주었다. 스무 살 무렵에 꾸던 막연한 꿈이, 거의 쉰 살이 다 돼서 이루어졌다. 꿈에는 유통기한이 없으니 꽤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자신을 칭찬했다. 


미국에 와서 5년 동안 살면서, 내가 젊은 시절에 막연히 꿈꾸던 미국은, 막상 집을 얻고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하는 미국과 똑같지는 않음을 알게 되었다. 외국인 회사를 20년 넘게 다녔고, 같은 회사의 한국 사무실에서 미국 사무실로 옮겨온 것인데도 직장 생활도 매우 달랐다. 아이 학교 보내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이웃들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방송에서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 굴지의 IT 기업의 사장까지 올라간 사람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질문 가운데, 어떻게 브라질에서 나고 자라서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민자 출신의 직원이 상장 기업의 사장까지 오르게 되었냐는 질문에, 모든 것이 풍부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많은 난관이 있는 시장에서 일하다 보니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은 일에도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익숙해졌다고 했다. 그 외에도 회사 생활하면서 적절한 시점에 필요한 자리에서 여러 가지 올바른 결정들을 한 것이 CEO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비결인 것 같다고 답변했다. 


이 양반이 그 회사에 입사한 것이 1995년이었으니 26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미국 나이로 올해 50이라고 하니, 나보다 살짝 어리고, 1995년은 내가 대학교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미국 회사에 입사하면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해이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직장 생활의 경로도 다르니 열등감 같은 것을 느낄 필요는 없다. 원래 남하고 비교하면서 주눅 드는 스타일도 아니고. 다만,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혹시라도 내가 시간을 되돌려서 1995년으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고.


이 세상에 가장 공평하면서 엄혹한 것이 시간이라고 했다.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과 경험을 나누는 것은 가능하다. 혹시라도 나와 비슷한 길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도 갈 길이 많은 나 자신을 위해서, 미국에서 회사 생활하면서 느낀 것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이런 것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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