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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Feb 06. 2022

왜 미국에서 일하고 싶은가

미국에서 일한다는 것의 의미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인 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오고 싶었었다. 왜 꼭 미국이어야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다른 나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친숙해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책의 저자들이 전부 미국의 대학 교수님들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의 삶이 팍팍해서였던 아니면 정말로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선생님들께 배워가면서 공부하고 싶어서였던 간에 하여튼 미국이었다.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니면서 처음 가본 미국은 천국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햇빛에 눈이 부셨고 맑은 공기와 한적한 도시는 오히려 영화를 보면서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멋져 보였다. 오후, 네 시만 넘어가도 사무실에 사람이 없고 주차장도 텅텅 비었다. 한국에서 출장을 온 사람들만 늦게까지 일했다. 우리끼리 모여서 저녁을 먹으러 간 한국 식당은 오히려 서울에서 먹던 어설픈 한식보다도 더 푸짐하고 맛있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두 번째로 들어간 직장도 역시 실리콘 밸리 지역의 회사였다. 출장을 여러 번 다니면서 처음에 씌워진 콩깍지는 어느 정도 벗겨졌지만 역시 그래도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유학을 생각했던 것은 참으로 막연한 꿈이었지 싶다. 여태까지 살아온 삶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으니 뭔가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좋아하고 학점도 곧잘 받았지만, 공부를 계속해서 더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공대를 다니면서도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못했으니 학자 체질은 아니었던 게다. 그나마도 나중에는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공부에 더 빠져있었으니 학교보다는 산업 현장의 역군으로 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첫 직장에서의 일화가 생각난다. 우리는 처음 다뤄보는 제품의 설치와 운용을 지원해 주기 위해서 미국 본사에서 출장을 오신 교포 엔지니어분이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중년은 돼 보이는 양반인데 직급이 없었다.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냥 선배님으로 호칭하기로 했다. 신입 사원이었던 나는 당연히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김태용 씨가 호칭이었다. 내 사수는 대리님이었고, 그 위에 과장님들도 있었고 호랑이 차장님도 있었고, 부장님까지 층층시하였고, 그 위에는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한국 지사가 조선시대 계급 사회였다면 미국 본사는 만민이 평등한 신세계였다고 생각했을까? 한국 지사였다면 최소한 부장님 연배는 되어 보이는 분이, 사무실에서 온종일 회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현장에서 현역으로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것이 멋져 보였을까? 자식들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친구들한테 선배님 소리 들어가면서? 아니면 그 양반이 미국 본사 돌아가면 눈 부신 햇살과 맑은 공기가 있는 멋진 사무실에서 여유 있게 일하다가 오후, 네 시에 잔디 마당이 있는 단층집으로 퇴근해서 뒷마당에서 바비큐를 구우면서 맥주를 한잔하는 그런 모습이 부러웠을까?


첫 직장에서의 짧고도 강렬한 경험에 비해서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는 좀 더 자주 그리고 자세히 미국에서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가을에 그 회사에 입사해서 11월에 교육받으러 본사로 출장을 갔는데 마침 교육 기간 중간에 미국 (민족 최대의 명절) 추수 감사절 휴일이 걸렸다. 같이 교육받으며 친해진 입사 동기가 고향이 라스베이거스라는 말을 듣고, 그곳에도 멀쩡한 가정집이 있고 초, 중, 고 그리고 대학교까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친구 초대로 서로 번갈아 운전하면서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이 친구의 본가에 가서 말로만 듣던 칠면조 요리를 먹어보았다. 요리도 낯선데 하필 식탁의 자리가 버지니아주 출신이라는 그 친구 할머니 옆이어서, 원래도 힘든 영어에 남부 사투리 듬뿍 섞인 할머님의 수다를 알아듣는 척하면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상큼한 추억이 담긴 첫 출장을 시작으로 일 년에도 몇 번씩 본사로 출장을 다니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 필드 엔지니어들의 삶을 좀 더 자주 엿보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직접 미국 고객들과 일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는 일 자체는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고객들 만나서 우리 제품과 기술에 관해서 설명해주고, 고객 프로젝트에 어떻게 적용할지 의논하고, 제품을 사용하면서 생기는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그런 경험을 잘 정리해서 우리 제품 개발 부서에 전달해서 다음 버전에서 개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런 일들은 나도 한국에서 똑같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아무래도 미국 사무실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본사의 엔지니어링 팀과 더욱 자주, 더 가까이서 커뮤니케이션하다 보니, 그 친구들의 목소리가 우리 제품에 훨씬 더 빨리 그리고 많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물론 외국 지사에서 일하는 우리와는 영어로 의사소통도 쉽지 않고 시차도 있어서 자주 이야기하는 것도 힘들 테니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미국 본사로 출장을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회사 캠퍼스 일 층의 카페테리아로 내려갔다. 바깥 날씨가 워낙 화창하길래 다들 점심을 사 들고는 밖에 나가서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먹으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본사의 CEO가 식판을 들고 나타나더니 같이 앉아서 먹어도 되겠냐고 하는 것이다. 바짝 긴장해서 얌전하게 식사하던 나와 달리, 미국 동료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일상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어느샌가 업무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더니 그때부터 자기들이 일하면서 힘든 점들, 혹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또 CEO는 그걸 열심히 경청하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어떤 부사장이랑 회의를 잡아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이러니 본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은 사내 정치라고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것과는 좀 결이 다르다. 실리콘 밸리에 있는 본사에 주요 임원들과 핵심 개발자들이 모여있으니, 그 현장에 같이 있어야 돌아가는 상황도 빨리 파악이 되고, 본인의 아이디어를 개진할 기회도 더 많이 주어지는 것이다. 일부러 한국 지사를 차별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상황이 그쪽이 훨씬 좋은 것뿐이다. 


나보다 좀 늦게 우리 회사의 인도 지사에 입사한 필드 엔지니어가 한 명 있었다. 똑똑하고 태도도 좋아서 나랑도 친하게 지냈는데, 이 친구가 어느 날 난데없이 본사의 필드 엔지니어 포지션으로 지원했고 결국 받아들여져서 실리콘 밸리 지역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친구는 이른 시간 안에 승진을 거듭해서 결국 필드 엔지니어들을 총괄하는 본사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아시아에서 자기 위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사이에, 그들 모두를 지휘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친구의 고속 승진이 오로지 미국 본사에서 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이가 젊으니 의욕도 있고, 그러면서도 너무 들이대기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사근사근하게 잘 지내는 스타일인데, 똑똑하기도 했고, 인도 출신치고는 영어의 억양이 심하지 않고 매우 논리적으로 말을 잘했다. 좋은 태도에 능력도 있으니 어디에서도 승진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합리적으로만 흘러가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그 친구가 벵갈루루에 있던 인도 지사에서 층층시하 지사장과 다른 매니저들 밑에서 원래 하던 일을 했더라면 절대 지금의 포지션까지 가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어땠을까? 젊고 파릇파릇하던 그 시절, 나도 본사 엔지니어들 못지않게 열심히 하고 아이디어도 많고 의욕도 넘치는데, 그 시절에 미국에 가서 일했으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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