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미국에서 살 것인가
12시에 점심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짝을 지은 넥타이 부대가 사무실 근처 식당가를 점령하는 한국과 달리, 내가 있는 이곳 샌디에이고 사무실은 워낙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점심시간도 조용하다. 가끔은 차를 타고 근처 식당으로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배달시켜 먹거나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다. 나는 집사람이 간단하게 떡을 싸줄 때도 있고 제대로 된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챙겨줄 때도 있다. 사무실의 왕언니이자 사장님 비서인 킴 (킴벌리인데 킴이라고 부른다)이 얼마 전에 점심을 시키려고 나에게 물어보길래 나는 집사람이 샐러드를 만들어줬다고 대답했다. 영어로 “My wife made a salad for me.”라고 했고 크게 문제가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킴이 그걸 다시 확인하면서 쓴 표현이 “Oh, your wife made you a salad?”였다. 집에 오는 퇴근길에 이 간단한 대화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이라기보다는 좌절감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문장의 5 형식은 영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우는 문법이다. 내가 쓴 표현은 3 형식의 가장 기본적인 주어 + 동사 + 목적어 형태이고 킴이 쓴 표현은 4 형식으로 간접 목적어와 직접 목적어를 이용한 표현이다. 뭐 대단히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도 평소에 4 형식 문장을 자주 쓴다. 예를 들어서 “Let me give you a piece of advice” 이렇게 내 생각에 상당히 세련된 문장으로 “내가 조언 한마디 해 줄게.”라는 표현도 술술 잘한다. 근데 made라는 단어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시험 문제로 나왔다면 맞혔겠지만, 이해만 하고 쓰지 못하는 표현이다.
문법만이 아니고 단어도 그렇다. 비가 오는 날 사무실 앞에서 내가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쓰고 불편한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본 동료가 한마디 툭 던지고 갔다. “What a dedication.” Dedication이라는 단어는 헌신하다, 전념하다 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아주 쉬운 단어는 아니지만, 충분히 잘 알고 있고 나도 가끔 쓴다. 그런데 이 단어를 이런 식으로 사용해서 “애쓴다”라는 표현은 할 수 없다. 내가 혹시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상황에서 애쓴다고 말하고 싶었다면 "You’re going through a lot of trouble." 혹은 "You’re making such an effort." 이런 정도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동료가 씩 웃으면서 했던 What a dedication이라는 표현처럼 밉지 않게, 하지만 맛깔나게 살짝 비꼬는 그런 맛은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 팀장 역할을 하는 후배와 얼마 전에 통화를 했다. 원래 개발자였는데 요새는 아침에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온종일 회의만 해서 기술적인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매니저가 되면, 특히 실무에서 멀어져서 임원급으로 올라갈수록 본인이 직접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업무의 방향을 조율하고 전략을 짜는 일이 더 많다. 대부분의 이런 일들은 고객이나 파트너사 그리고 상사나 부하 직원들과의 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월요일 아침 7시에 동부에 있는 보스와 스태프들이 모여서 하는 주간 회의를 시작으로 보통 하루에 작게는 5개 정도, 많게는 8개까지 빡빡하게 회의가 있다. 우리끼리 모여서 하는 전략 회의도 있고, 프로젝트 팀원들이랑 하는 프로젝트 점검 회의도 있다. 고객이랑 같이하는 프로젝트는 고객사 엔지니어들과 미팅하고, 파트너사랑 하는 미팅은 비즈니스 협력을 주제로 논의한다. 물론 프로젝트 제안서 발표 미팅도 가끔 하는데, 주로 온라인으로 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직접 고객사로 출장을 가서 얼굴을 보면서 하기도 한다.
이 모든 업무가 말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이 주관하는 미팅이라서, 나는 참석해서 주로 듣기만 하는 편안한 회의도 있지만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이끌어가는 프로젝트 미팅이나 내가 주도한 제안서 프레젠테이션은 당연히 내가 그 회의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동료나 부하 직원들과 하는 회의에서도 내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친구들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윗사람들이랑 하는 회의에서 내가 관련된 분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얼마 전에 보스에게 받은 뼈아픈 피드백이 있다. 아는 것도 많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있는 것을 잘 아는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발언을 자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중한 성격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도 2년 가까이 되고, 맡은 포지션도 있으니 좀 더 목소리를 높여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피드백이다. 고객과의 미팅도 그렇고 회사 직원들과의 미팅도 그렇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먼저 나대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부분에서는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내 목소리를 냈었다. 그게 몇백 명 앞에서 하는 강연이건, 아주 불편한 고객사 임원들을 모시고 하는 프로젝트 일정 지연에 대한 설명이던, 직원들끼리 모여서 하는 내부 미팅이건, 장소와 분위기 그리고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서 이야기했고, 주변의 대체적인 평가도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신중한 성격은 그대로인데 미국에 와서 적극성이 많이 떨어졌다는 의미이다. 하는 일도 이십 년 넘게 평생 하던 일이고, 주변에 특히 나를 미워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도 아니니, 영어에 대한 불안감에서 온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직장 생활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5년이든 10년이든 주어진 시간이 있다고 하면, 미국에서 그 시간 안에 내 경력에 맞는 위치에 올라가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미국 와서 산 지 5년밖에 안 됐으니 시간이 좀 더 필요하고, 노력과 의지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아직은 그렇게 믿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다. 하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중요한 회의에서 가슴에 담은 말은 한가득인데, 좀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고 사장과 부사장을 포함한 워낙 많은 사람이 있어서 짧게 요점만 짚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일 경우에, 중언부언하게 될까 봐, 혹은 내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이 되지 않고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될까 봐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좌절감이 들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면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미국에서 일하면 영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힘들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