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정체성에 대해
저는 지금 휴대폰 번호를 세 개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쓰던 한국 휴대폰 번호, 미국 와서 직장에서 받은 미국 휴대폰 번호, 그리고 이번에 옮긴 직장에서 새로 받은 번호, 이렇게 세 개의 번호가 있습니다. 다행히 작년에 전화기를 바꿀 때 유심 카드가 두 개 들어가는 기종으로 변경해서 휴대폰은 두 개만 들고 다닙니다만 그것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갈때도 전화기를 두 개 갖고 다니고, 확인도 두 번 해야 하고, 충전도 각자 챙겨줘야 하니까요.
3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 올 때 한국에서 쓰던 휴대폰 번호를 살려놓고 온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중요한 연락이 올 수도 있는데, 제가 미국으로 온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약간은 감정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직장 생활 시작하고 저와 20년 이상을 같이한 휴대폰 번호는, 단순한 편리성을 넘어서 저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몇 년 동안 연락을 하지 못하던 지인이라도 이 번호만 갖고 있다면 언제든 저에게 닿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 계신 어머님은 여전히 저한테 급한 연락을 하실 때는 예전 한국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시죠.
미국에 와서는, 당연히 회사에서 만들어준 번호와 전화기를 썼습니다. 집사람과 아들 녀석은 버라이존 대리점에 가서 새로운 번호를 만들어줬지만, 회사 정책상 회사가 지원해주는 휴대번호는 회사의 IT 팀이 관리하도록 되어있으니, 그쪽에서 만들어준 번호를 3년 동안 잘 썼죠. 20년 넘게 쓴 한국 번호만은 못해도, 어느덧 이 녀석도 미국에서의 제 정체성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와서 만난 사람들은 이 번호로 저를 기억하니까요.
다만, 한국과 좀 다르게, 미국 사람들은 전화기와 전화번호를 두 개 갖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비즈니스 관계로 만난 사람은 회사에서 지급된 폰 번호를 주고받는데, 이 번호는 그 사람이 회사를 옮기면 바뀌는 번호라는 거죠. 따라서 어떤 사람의 휴대폰 번호를 알았다고 해서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물론 개인 휴대폰 번호를 알게 되면 그건 그 사람이 계속 쓰게 되겠지만, 비즈니스 관계에서 개인적인 관계로까지 발전을 시켜야 가능한 일인데, 미국 사람들에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달에 회사를 옮기게 되면서, 이제 저도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처럼 휴대폰 번호 두 개에 전화기도 두 개를 갖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네요. 새로 받은 번호는 당연히 아직 기억도 못했고, 심지어는 전화기도 제가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아이폰을 받아서, 회사 이메일과 일정 앱 말고는 제대로 써 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일주일 되었으니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긴 하겠습니다만,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도 이 녀석에게 얼마나 애정을 쏟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디서 업어온 자식 취급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까지 들 지경입니다만, 지금 생각 같아서는 그냥 받은 그대로, 회사 일로만 쓰는 휴대폰이 될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전화기의 용도를 넘어선 지 한참 되었습니다. 대인 관계에서 개인적인 추억, 금융 관리에서부터 엔터테인먼트까지, 맘만 먹는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는 기기가 되었네요. 그래서 휴대폰 번호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번호와 개인적인 미국 번호를 안드로이드 폰에서 쓰고, 회사의 미국 번호를 아이폰에서 쓰는 제 모습이, 현재 미국에 이민 와서 두 번째 직장을 막 들어간 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