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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이킴 May 15. 2020

하는 일은 임원인데 단어는 초딩

남사스러워서 어디 하소연도 못하는

영어로 회의를 하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당연히 모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외국어로 말하는 것이 불편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네요.


이런 감정이 특히 더 심해지는 것은, 그 회의에서 내 역할이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입장일수록 더합니다. 회의 들어가서 인사하고 나서 쭉 이야기를 듣다가 간단한 질문을 하는 경우는 크게 부담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영어가 익숙해지고 나면, 말을 많이 하더라도 그게 미리 준비가 가능한 내용이나 매우 익숙한 분야의 발표이거나 하다면, 물론 우리말처럼 편하진 않지만, 이렇게 답답하다는 생각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약간 일방통행으로 준비한 내용을 설명하면 되니까요.


제 입장에서 가장 힘든 것은, 회의에서 제가 중재를 하는 입장일 때입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고객사의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것인데, 매일매일 짧게 아침 미팅을 하는 것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씩 고객사 임원들과 프로젝트 상태를 확인하고 우선순위를 조율하는 회의가 있습니다. 이주일에 한 번씩은, 15명 정도 되는 전체 프로젝트 인원들과 지난 2주간의 업무 성과를 분석하고 다음에 할 일을 정하고 하는 일인데, 이런 회의가 어렵습니다.


물론 회의 들어가기 전에 충분히 내용을 숙지하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회의 시작해서 처음 5분이나 10분간은 일방적으로 프로젝트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시간도 있죠. 하지만 회의 시간의 거의 대부분은 현재 상황에 대한 아이디어 교환이나 토론, 업무 할당이나 우선순위 조정 등, 미리 준비하고 들어갈 수 없는 내용입니다.


회의의 어젠다는 물론 미리 정해놓고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자료를 보자고 하는 경우나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도, 어떤 객관적인 사실에 관한 내용이라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해주면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을 조율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서로 다들 하하 호호하면서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어도 쉽지 않은데, 분위기가 조금 과열되거나 배가 산으로 가기 시작한다거나 하면, 그걸 솜씨 있게 잘 다독여서 다시 생산적인 대화가 되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말 한마디 단어 하나가 조심스럽습니다. 우리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말 한마디 잘 못하면 아주 거시기한 상황이 벌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모국어도 아닌 영어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런 일을 자주 겪으니 영어 공부의 방향에 혼선이 옵니다. 아주 정확하게 제가 알고 있는 단어가 몇 개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IT나 비즈니스 분야 한정이라면 꽤 높은 수준의 단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냥 일반 분야의 영어 단어 수준을 본다면, 빈도수 기준으로 3천 단어 정도부터 갸웃거리기 시작하고, 4천 단어 넘어가면 헤매더군요. 7천, 8천 단어 쪽으로 가면 모르는 단어가 훨씬 많고요.


어디서 들었는데 미국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아는 단어가 대략 5천 단어 정도라고 하니, 제 단어의 수준이 그보다 높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녀석들이 모르는 IT나 비즈니스 관련 용어야 제가 훨씬 많이 알겠습니다만, 그건 다 합쳐도 몇백 개 안될 거고요. 오히려 이 녀석들이 너무나 쉽다고 생각하는 단어는 제가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가 많을 테니, 서로 모르는 단어로 재봐도 제가 밑질 듯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영어 공부의 방향은 당연히 기본 어휘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되는 것이 맞겠죠. 그리고 제가 중고등 학생이라면 당연히 그 방향으로 하는 게 맞고요. 문제는, 제가 학생이 아니고 직장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본인의 의견을 많이 개진하거나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입장에서 일하는 포지션이라는 거죠. 그럴 경우에 제가 고민이 되는 것은, 이렇게 초등학생도 알아야 하는 단어를 외우는데 시간을 더 들일 건지, 아니면 양보다는 질이라고,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약간씩 뉘앙스가 다른 단어, 그리고 그런 단어들을 조합해서, 어떻게 '아'와 다른 '어'를 맛깔나게 표현하는데 노력을 더 할 것인지 고민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은 사실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사놓은 '이것이 미국 영어다' 시리즈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걸 자주 보고 있습니다. 어려운 표현이라기보다 현지에서 미국 사람들이 쓰는 표현들이, 여러 가지 다른 뉘앙스로 재미까지 곁들여서 나와있으니, 공부한다기보다 그냥 읽고만 있어도 시간이 잘 가는 책이죠. 


반면에, 내가 미국에 와서 몇 년을 살았는데 동네 초딩보다도 단어를 몰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2권 한 세트로 되어있는 '빅 보카 (Big Voca)'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이거 정말 보기 힘듭니다. 특이하게도 공학박사 (신영준 저자)가 지은 책답게 11억 개의 단어 모음을 분석해서 가장 사용 빈도수가 높은 단어 8천 개를 순위대로 나열한 것입니다. 아이디어 자체는 매우 공감합니다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첫 페이지부터 냅다 단어 리스트가 1번부터 8,000번까지 나옵니다. 


고민스러운 것은, 앞부분부터 보자니 거의 아는 단어이고, 뒷부분부터 보니 아는 단어가 거의 없고, 그렇다고 어디 중간부터 딱 찍어서 보기엔 앞의 중요하지만 잘 모르는 "초딩 단어"를 다 건너뛴 것 같아서 찝찝하다는 점입니다. 에고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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