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팬?
미국에 와서 일하게 되면서 영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일상적인 업무도 하루하루 쉽지 않고, 혹시 중요한 발표라던가 회의/보고 등이 있게 되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제 영어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자책을 하는 경우가 많았죠. 외국어라는 것이 읽기, 쓰기, 듣기 그리고 말하기가 잘 균형을 이루면서 발달을 해야 하겠습니다만, 제 경우에는 말하기가 제일 힘듭니다.
영어로 말하기가 힘든 이유는, 단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문법이 틀려서이기도 합니다만, 그런 것이야 어차피 시간을 들여서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데, 제가 생각하는 다른 큰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말하는 속도 문제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말하는 속도를 의식하고 측정해 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미디어와 인터뷰했던 자료를 갖고 세어보니 대략 분당 110 단어 정도 이야기하더군요. 글자 숫자로는 350자 정도가 됩니다. 방송에서 1분에 대략 원고지 2장 분량, 300 ~ 350자 정도를 읽는 것이 적당한 속도라고 하니 대략 평균이나 살짝 빠른 정도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말하는 상황이나 내용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영어는 우리말과 달라서, 음절 단위보다는 단어의 숫자로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가 평균적으로 크게 부담 없는 상황에서 대략 분당 130 단어를 말하는데요, 제가 이전 글에서 (https://brunch.co.kr/@tystory/28) 원어민들 평균 대화 속도가 분당 150 ~ 190 단어이고, 방송 아나운서들이 분당 200 단어를 말한다고 했는데, 최근에 찾은 다른 연구(https://www.marchex.com/blog/talkative/)에 따르면 미국인들 평균 말하는 속도가 분당 100 ~ 150 단어라고 하니, 제 속도는 딱 평균 속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부담 없이 이야기할 때의 속도이고,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이것보다 빨리 말하면서, 호흡도 가빠지고 그에 따라서 발음도 부정확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런 이유로, 뭔가 말을 좀 천천히 하는 유명인사를 찾아서 그 사람의 영상을 보면서 여유를 갖고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미국 뉴욕의 주지사이면서 올 한 해 코로나 사태로 유명해진 앤드류 쿠오모였습니다. 이 양반이 57년생이니 정유년 닭띠이고 올해 우리 나이로 63세가 되시네요. 뉴욕시 퀸즈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뉴욕에서 계속 대학과 로스쿨까지 다녔으니 뉴욕 토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뉴욕 사람들이, 아무래도 미국 동부의 대도시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말이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렇지도 않다고 합니다.
코로나 전에는 이 양반을 잘 몰랐는데, 코로나 관련 브리핑을 하는 쿠오모 주지사의 동영상을 보고, '이거다! 이 양반으로 결정했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워낙 말이 느릿느릿하고, 단어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서 말씀을 하는 스타일이라서, 제 이미지 트레이닝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처음에는 말을 너무 느리게 하길래, 혹시 이민 1.5세대 정도, 즉 외국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미국에 온 것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을 정도입니다. 이 양반이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뉴욕 토박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두 번째로 든 의심은, 혹시 그러면 부모님께서 이탈리아 이민 1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름 그래도 미국에서 4년 살았고, 아들 녀석을 이곳 공립 고등학교에서 졸업을 시킨 부모답게, 그리고 학교에서 물어보는 가정통신문(?) 같은 설문조사에서 왜 집에서 모국어를 쓰는 시간과 영어를 쓰는 시간을 물어보는지가 궁금했던 사람답게, 그 느릿느릿한 영어에 대한, 나름 합리적인 설명을 찾고자 했던 거죠. 참고로, 저도 나중에 아이 학교 설명회 같은 자리에서 들은 건데, 집에서 부모와 아이가 대부분의 대화를 모국어로 하는 경우, 아이의 영어 능력 발달이, 집에서 영어를 쓰는 가정에 비해서 현저하게 느리다고 합니다. 저야 영어 실력보다는 아이와의 대화를 더 원했고, 사실 영어로 대화가 불편하기도 해서 당연히 한국어로만 대화를 했습니다만...
쿠오모 주지사의 아버님은, 1983년부터 1994년까지 3번에 걸쳐서 뉴욕 주지사를 지내신, 역시 뉴욕 퀸즈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뉴욕 토박이라고 합니다. 그 부모님이 이탈리아 이민 1세대로 식료품점을 하셨지만, 이 분은 뉴욕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대학교 및 로스쿨까지 뉴욕에서 자라신 퍼펙트한 "미쿡" 사람입니다. 다만, 이 분은 이민 1세대인 부모님과 함께 지냈으니, 아마도 그 시절에 집에서는 영어보다는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했을 것이고 그 영향이 어느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고 짐작을 했습니다. 1984년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했던 "A Tale of Two Cities"라는 연설이 아주 명연설로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유튜브에서 찾아서 잠깐 들어봤는데, 뭐 이탈리아 악센트나 그런 것 잘 안 들리는 그냥 미국 사람이더군요. -_-; 부모님께서 이탈리아 남부에서 살다가 이민 오셨다고 하니, 그쪽 분들 특유의 여유로움이, 비록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을까라고 저는 계속 주장해 봅니다. ^^;
뭐 그런 이유로, 틈날 때 가끔 쿠오모 주지사의 동영상을 찾아서 보는데요, 워낙 지난 3월부터는 계속 코로나 관련 뉴스 인터뷰와 브리핑이 대부분이어서 다양성이 좀 떨어지는 느낌이 있어서 아쉽습니다. 최근에는, 뉴욕의 코로나 사태 브리핑 때 화면을 나누어서 옆에 자료를 띄워놓고 숫자와 상황을 설명하는 동영상이 많아서, 회사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놓고 발표하는 것과 좀 비슷한 느낌이려나 하면서 참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 긴장되는 회의가 있기 전에 짬이 좀 나면, 얼렁 쿠오모 주지사의 동영상을 짧게라도 보면서, 그 말 하는 톤과 느긋함을 벼락치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나서 회의에 들어가곤 합니다. 굉장히 도움이 된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뭐 약간의 자기 암시 효과가 있어서, 자꾸 급해지고 빨라지려고 할 때, 문득 떠올리면 좀 진정효과가 있는 것도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