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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d의 무의식과 고착

고전적 정신분석이론의 창시자

by 장준

많은 논란과 비판을 받은만큼, Freud의 이론처럼 관심을 받고있는 이야기는 세상에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무의식’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접근한 첫 번째 인물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어린시절에 겪은 억압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귀인하는 듯 하다.

Freud가 살았던 Vienna가 그러하듯, 모든 사람의 이면에는 어두운 뒷골목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숨기거나, 잊어버리거나, 감추려 한다.

심리학의 시작점인 정신분석에 대하여 알고 싶다면, 일단 Freud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고 과학연구에 있는 힘껏 몰두했던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솔직하게 당신의 과거를 물어보려 할 것이다.

이러한 면모에서 정신분석의 기초는 ‘무의식에 대한 해석’이라기 보다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Freud의 대답은 과학계를 넘어, 인문학적 분야와 예술 및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Freud의 이론은 심리학의 시작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인류의 지식 수준을 높여주었다.

실제로, 현재 임상장면 및 상담분야에서 사용되는 심리이론과 상담기술은 대부분 Freud의 영향을 전반적으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심리학의 창시자의 기본적인 틀을 부정하며 심리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되는 말이므로, 이는 어찌보면 당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Freud의 정신을 잇는 대상관계이론 학자 Anna Freud와 Melanie Klein을 시작으로 영국에서도 다양한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며, Freud의 지식적 계보를 이어나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수 많은 학자들이 그러하듯, Freud가 제시한 ‘무의식’의 기본적인 역동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론들이 생겨나며 심리학은 현존하는 지식층에 녹아들며 다양한 심리이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는 Freud의 이론을 반대하는 이단자들이 생겨났다는 뜻이 아닌, 오히려 과학의 관점을 넓히는 촉진제로 작용하기 시작하여 세상의 다양한 지식층을 이해시켜주는 윤활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한 가지 이론을 꼽자면 ‘파지이론’을 꼽을 수 있겠다. IT 및 전산처리 과정에서 인간의 생각과정을 유추한 파지이론은 컴퓨터가 정보입력이 되면 그에 대한 답이 산출되는 과정을 보며 이러한 이론적 용어를 생각해낸 듯 하다.

물론 이에 대하여 컴퓨터 전산처리 과정이 심리학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심리학이 컴퓨터 업계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논하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다투는 이야기가 되겠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바는 시작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파지에 대해서는 “심리학은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려는 학문이므로 전반적으로 모든 학문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심리학과 컴퓨터 업계에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달했다.” 정도로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겠다.

저자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심리학이 컴퓨터 이론과 상호작용된 파지이론은 현재 인지심리 및 교육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은 어느 분야에도 적용 가능하며, 어디에도 활용될 수 있는 자유로운 학문인 것이다.


Freud는 즉, 인간의 행동양상에 있어서 어떠한 추상적으로만 존재했던 생각 밖의 ‘무의식’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는 개념을 내놓았는데, 이것을 정신역동적 요소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며 심리치료의 새로운 지평선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만들었고, 기본적인 사람을 바라보는 틀을 만들었다. 당연스럽게도 Freud의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심리학자 이외의 많은 인간을 다루는 직업군에서도 앞다퉈 채용하여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사실상, 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한 면모를 관측하기는 쉬우나, 그것을 정확히 설명하고 표현하기란 극도로 곤란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는 자신만의 이론을 제시하였으나, 독자들의 핵심적인 이해를 위하여 Freud의 이론을 관점을 우선적으로 제시하고, 이후 이어지는 다양한 학파에 따른 추가적인 이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Freud는 자신이 제시한 이론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규칙과 일말의 다른 여지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고수하였지만, 이 장에서는 지식적인 독자들의 이해를 함유하기 위하여 고전적인 정신분석적 관점을 유지하기보다 좀 더 유도리있고 수용적인 관점으로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많은 심리학자의 이론을 보다 보면, 개인의 인생사가 전반적으로 이론에 녹아들어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Freud 또한 그러한데, 전반적인 이론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인생사를 돌아보면 더욱 쉽고, 어떠한 뉘앙스로 Freud가 심리적인 묘사를 행하였는지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이론을 이해하기에 앞서, Freud의 인생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는 정신분석의 전반적인 태동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Freud는 1856년 5월 6일, Freiberg에서 태어났다. 당시 Freiberg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있었고, 현재는 독일에 위치하고 있다. Freud의 아버지, Jakob는 꽤나 사업적으로 성공한 사업가였고, 40살에 두 번째 아내를 받아들여 8남매를 낳았는데, 그 중 유일한 남자아이인 Freud는 가장 귀여움을 받았다. 특히 다른 여자 자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Freud의 어머니에게 사랑을 극진하게 받았으며, 이것은 Freud에게 과할 정도의 자신감과 성취감을 만들게 하였다. 실제로 Freud는 자신감에 걸맞는 성공을 부모에게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1860년에 Freud는 Vienna로 이사를 하였고, 당시 어린나이의 Freud는 공화주의자 Oliver Cromwell과 전투적이고 ‘전략의 아버지’ Hannibal 장군을 엿보며 마음깊이 좋아한 듯 하다. Freud의 가족은 유태인 집안이었는데, Hannibal은 유태인을 지휘하여 로마를 공략하였다. 이는 당시 Freud가 살던 오스트리아가 로마 가톨릭 국가로써, 유태인을 배척했는데, 이에 대한 반발심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12살이던 Freud에게 Jakob는 유태인이 겪는 당시의 수모적인 경험을 이야기 했다. 유태인이라며 기독교도인 젊은 사람이 Freud의 아버지의 모자를 집어던지며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다. 그에 대해 아버지는 그냥 무기력하게 침묵하며 모자를 건저내며 걸어갔다. 그러한 Jakob의 무기력한 모습은 Freud에게 유태인의, 그리고 아버지의 권위적인 모습이 무너지는 것에 꽤나 큰 충격을 받은 듯 하다.


1890년대 Vienna는 아름다운 도나우강이 흐르며, 왈츠를 추고 사교를 즐기는 사람이 넘쳐났고, 카페에서 우아하고 멋드러진 분위기 속에 여유를 즐기는 도시였다. 허나 그 도시의 이면에는, 빈곤이라는 거대한 그림자가 사로잡혀 있었는데, 당시 Vienna의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뒷골목에는 노숙자와 실업자가 득실거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우아한 태도 속에는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있었는데, 당시 Vienna의 시장, Karl Lueger는 유태인을 배척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으나, 그는 유태인을 정당하게 다루는 것이라 합당화하였다. 매춘과 성병, 질병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비도덕한 모습은 마치 화려한 Vienna의 이면을 드러내는 욕정적이고 본능적으로 타락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이후 이러한 면모는 Freud의 이론에 영향을 미친 듯 하였다.


1873년 Freud는 Vienna의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881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생물체의 구성을 연구하는 조직학(組織學)과 신경생리학을 전공하였다. 당시에 Freud는 과학자가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스승 Ernst Brücke는 당시 생리학자로써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과학은 ‘생명의 연구는 화학적, 그리고 물리적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전반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정신을 이어 1876년부터 1881년까지 Freud는 신경세포에 대해 연구를 하며 ‘인간의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신경계에 대한 연구는 혁명적인 충격을 가져다 주었는데, 고도한 생명체라 여겨졌던 인간의 신경과 저급하다 여겨졌던 개구리의 신경계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개구리와 인간의 성분은 같으나, 지적 능력의 수준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다는 것인가?

Ernst Brücke는 그에 대해 ‘기본적인 육체적 수준은 같되, 인간은 개구리보다 생각의 복잡한 연결이 존재할 뿐이다’로 결론 내렸다. 1882년 Ernst Brücke는 Freud와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Ernst Brücke는 당시 열약한 환경과 급여, 그리고 유태인인 Freud에게 가해지는 적은 승진기회로 인하여 진로적인 어려움을 가질 것이라 충고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라 Freud의 아버지 Jakob은 1873년 경제적 불황으로 인하여 파산했고, 더 이상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핵심적으로 Freud는 학문을 버리게 된 계기가 있다. 그것은 Martha Bernays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다. 결혼을 하고 그는 자신이 바란 과학자로써의 진로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 Freud는 돈을 벌기 위해, 의사로 활동하기 위하여 Vienna 종합병원에서 꽤 오랫동안 훈련을 했다. 처음은 내과의사 Hermann의 조수로 일했다. Freud는 Hermann을 훌륭한 의사로 생각하였으나, 내과 진료 및 진찰과 수술을 상당히 지겨운 일로 느꼈다.

1883년 Freud는 Theodore Meynert의 심리치료 연구소에서 몇 개월간 연구를 시행했다. 당시 Theodore Meynert는 가장 저명한 해부학자로 신경병리학의 최고 권위자로 존재하였다. Theodore Meynert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신경구조가 집중된 곳은 뇌이며, ‘인간의 생각이란 신경학적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에 불과하다.’라는 그의 의견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Freud는 Theodore Meynert의 뒤를 이어 신경병리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4년에서 1887년까지 Frued는 코카인의 작용기저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다. 자신에게 코카인을 투여하며 연구를 진행하였고, 자신의 부인 Martha Bernays에게도 코카인을 가끔 처방하곤 하였다. Freud는 당시에 코카인이 진통작용을 멈추게 하는 부작용이 없는 마취제로 여겼다.

Freud의 친구 Ernst von Fleischl Marxow가 손에 있는 종기로 인하여 극도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모르핀을 과다 투여하였는데, 모르핀에 중독이 되었다. Freud는 친구 Marxow에게 모르핀 대신 코카인을 쓰라고 권유하였다. 이후 Freud는 자신의 아버지 Jakob의 눈 수술을 진행하며 코카인으로 국소마취를 하였다.


Freud의 친구 Karl Calder와 Leopold Königstein이 수술을 집도했고, Freud가 수술의 조수를 맡았다. Karl Calder는 코카인의 최초 발견자는 자신이라고 내세웠다. Freud의 업적은 무시되었고, 그의 연구는 무산되었다. 웃기게도, 1886년 코카인에 대한 중독성과 위험이 알려지며 코카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코카인의 치료적 활용을 끊임없이 언급했던 Freud가 비난을 받기 시작하며 그의 평판은 땅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Freud는 한 가지 사실만을 가지고 일반화를 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고, 전반적인 약물의 위험성을 경계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 Marxow또한 돌이킬 수 없는 코카인 중독자가 되어버렸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경의학자인 Jean Martin Charcot의 병동에서 Freud는 소정의 장학금을 얻어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Charcot은 그의 환자 Jane Əbül의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당시 연구주제의 핵심은 히스테리 증상이었다.

히스테리란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어원으로, Hystera ’자궁(子宮)‘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여성에게 특징적으로 일어나던 이 증세는 마비, 경련, 환각, 기억상실 등 특징적인 증세였는데, 과거 그리스에서 히스테리 증상은 여자에게 귀신이 쓰인 마녀의 증거라고 내몰리곤 하였었다.


히스테리의 치료적 관점에 대하여 당시 학파는 두 가지 관점을 유지하였다.


첫 번째, 여성의 성기에 ’여성의 자궁에서 일어난 질병‘으로 난소에 압력을 가하거나 얼음으로 차갑게 하여 온도 변화를 준 후, 음핵에 외과적 수술을 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두 번째, 히스테리는 전적으로 망상으로 인한 증세이고, 여성의 거짓연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허나 Charcot은 그의 환자 Jane Əbül의 연구발표를 통해 기존의 히스테리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Charcot에게 있어서 히스테리 증상은 상상의 산물이 아닌, 신경전달에 이상이 생긴 신경증의 일종이며, 그러므로 이것은 남성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Jane Əbül의 증세에서 드러나듯, 물리적인 신체적 손상이 병의 원인은 아닌 듯 하다. Jane Əbül는 전신이 마비되곤 했는데, 손가락 끝에서 마비가 시작되어 팔로 올라오고, 그리고 어깨 중반에서 마비가 멈추곤 하였다.

이것은 신경의학적으로 상당히 기이한 현상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졸도 및 생리적 현상으로 인한 마비는 Jane Əbül의 증세와는 다르게 갑작스레 마비가 끝나진 않기 때문이다. 마비현상은 보통 얼굴 또는 사지에 일시적으로 약한 경련 현상이 오는 것이 관례적인 증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Charcot은 이를 기반으로 히스테리는 해부적인 구조로 설명할 수 있는 병이 아니며, 어떠한 신체 이면에 존재하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드러나는 부적응적 태도라고 말하였다. Freud는 Jane Əbül의 증세를 신체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면, 심리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원인이 아닌가 추측하기 시작했다.

Charcot의 발견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는데, 사람에게 최면을 걸면 히스테리와 같은 비슷한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Charcot은 최면을 통해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Freud는 이를 기반으로 심리치료에 최면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Charcot은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그 이유는 히스테리가 심리적인 이유로 일어나는 심인성질환이 아니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허나 Freud는 히스테리는 여성의 성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정신장애의 일종이라 추측하였다.


이후 신경병 전문의사로 개업한 Freud는 1886년 남성에게 일어난 히스테리 연구에 대해 발표하였는데, 이는 상당한 논란의 여지를 불러왔다. 이전 여성성기에서 비롯된다는 기존의 히스테리에 대한 인식과, 남자에게서도 이러한 증세가 일어날 수 있음을 드러냈다. Freud는 전기충격요법을 시행하기도 했으나, 큰 효과성을 거두진 못했다. 특이하게도 최면을 건 후, 이후 전기충격을 주면 때때로 치료효과를 보이는 환자가 나타났다. Freud는 심리치료에 있어서 최면요법을 채용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Charcot의 의견과 대립되는 최면이론이 흥행하고 있었다. Vienna에서 최면요법을 사용하는 Freud의 오랜 친구 Josef Breuer또한 최면요법을 사용하는 의사였다. Josef Breuer로부터 히스테리 환자의 흥미로운 연구사례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Josef Breuer의 환자 Anna O에 대한 사례로써, 그녀는 21세 상당히 박식한 여성으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꽤나 성적으로 미숙하며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는데, 1880년 Anna의 아버지가 병을 앓음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밤낮으로 극진히 돌보다가 12월이 되고, 결국 그녀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쓰러졌다. Anna는 심한 기침, 극도로 눈을 깜빡이고, 핵심적으로 히스테리증상인 오른팔과 목의 마비를 드러냈다. 언어적 장애도 드러나곤 했는데, 독일어로 질문한 후, 영어로 대답하는 언어적 양상을 드러내곤 하였다.


1881년 그녀의 증상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환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존에 존재했던 환각증세는 낮 동안에도 뚜렷이 보였으며, 밤이 되면 그녀는 멍한 상태가 되어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곤 하였다. 치료를 담당하던 Josef Breuer는 그 말들의 의미를 유추하여 최대한 말이 되는 말로 바꾸어 Anna에게 대답함으로써, 중얼거리는 Anna와 대화를 이어나가려 하였다. 그것은 Anna의 기분을 이전보다 한층 낫게 해주었으나, 환각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다.

Anna는 이러한 중얼거림 속에서의 이야기하는 치료를 담화요법이라고 불렀으며, 일부 진통을 낫게 해준다고 언급하였다. 허나 계속해서 나타나는 증상들은 히스테리 증상을 해결하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Anna에게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는 공수증(恐水症)이었다. 공수증은 물을 무서워 하는 병으로, 흔히 광견병의 증세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6주가 넘도록 Anna는 자기 의지로 물을 단 한방울도 마시지 못하였고, 컵을 보기만 해도 혐오감을 느끼며 소스라쳤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을 잃고 중얼거릴 때에, 공수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영국에 놀러갔을 때에, 지인의 집의 강아지가 사람이 마시는 컵의 물을 핥아 먹고 있는 것. 그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 것. 그러나 집 주인의 눈치를 보며 가만히 있었던 것 등 다양한 일들이 수면위로 나타났다. 이후 그녀는 집 주인에 대한 분노와 컵을 핥는 강아지에 대한 혐오감을 강력히 드러냈다. 제 정신을 차린 Anna는 여지껏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다고 하였다. 이 Anna O의 사례는 Freud의 흥미를 이끌었고, 최면요법의 효과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히스테리 증상의 최면요법을 사용하였을 때, 과거의 시작점을 찾게 된다면 증상이 사라졌고, 이후 불쾌감을 겪는 일이 없어졌다. 증상은 특히 최면중에 환자가 과거의 경험을 떠올릴때에 가장 큰 격렬한 히스테리 증상을 나타내곤 하였고, Josef Breuer는 최면요법이 히스테리 증상에 적용되는 심리치료로 채택하기 시작했다. 이를 정화법(淨化法)이라 칭하였다.


Josef Breuer의 정화법은 상당히 효과가 있었고, Anna의 치료의 진전에도 엄청난 진전이 있었다. 허나 Anna는 치료를 종결하기를 거부하고, Josef Breuer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다. 이후, Josef Breuer에게 성적으로 집착하며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망상을 말하며 집착하기 시작하였다. Josef Breuer는 충격을 받고 Anna의 치료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Josef Breuer의 아내와 함께 멀리 여행을 떠났다.

Anna O의 실제 이름은 Bertha Pappenheim으로, 이후 치료가 이루어지고 저명한 사회적인 사업가로 되었다. 이후 여성의 권리에 대하여 노력하였다. Freud는 Anna O의 사례를 자신의 스승 Charcot에게 이야기 했으나, 그의 스승은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Freud는 정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허나 Anna O의 사례를 통한 히스테리 증상의 치료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Anna O의 성적인 집착으로 인해 Josef Breuer은 이후 자신의 심리치료를 상당히 꺼려하였는데, Freud는 Josef Breuer를 설득하여 히스테리 연구에 관해 발표하도록 설득했다. Freud와 Josef Breuer이 같이 저술한 ’히스테리연구‘에 개괄적인 결과는 “히스테리 증상을 겪는 환자는 대부분 과거의 기억에 시달리고 있었다.”라는 것이었고, 이것이 시시하는 바는 엄청났다.


1. 히스테리 환자는 심리적인 상처, 즉 트라우마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2. 트라우마는 신체적 병을 일으킬 수 있다.

3. 트라우마는 기억 너머의 무의식 속의 힘으로 존재한다.

4. 격한 감정이 의식속에서 사라지면, 무의식속에서 억압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5. 부정적인 무의식은 평소에 억눌려 감정적으로 억제된다.

6. 억제된 감정은 히스테리 증상으로 변환된다.

7. 억압된 감정을 해방하면 히스테리 증상이 사라진다.

8. 심리치료는 다양한 심리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


이후 Josef Breuer의 정화법에 만족하지 않고 Freud는 “만약 히스테리가 과거의 상처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불쾌한 기억들을 억누를 수 있단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 이유는 Freud의 환자들은 일관되게 심리치료를 진행함에 있어서 극도로 저항하곤 했는데, 그러한 저항이 나타내는 일정한 주제는 바로 ’성적인 생각‘에서 전부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Freud는 Anna O의 증례에서 Josef Breuer에게 보인 Anna의 성적집착 또한 히스테리 증상의 일부이며, 이 또한 치료과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Josef Breuer는 이에 일부는 동의했으나, Freud의 ’성적인 생각‘을 전면 부정하며 Freud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Freud는 최면요법이 일부에게만 효과가 있을 뿐, 근본적인 심리치료방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Josef Breuer가 겪었던 곤란한 경험들을 Freud도 겪곤 하였는데, 최면요법과정 이후, 환자들의 히스테리 증상 너머의 치료자에 대한 성적인 집착이 극도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Freud는 최면요법이 환자의 병적인 성욕을 증가시킨다 추측하고 이를 그만두었다.

최면요법 대신, 프로이트는 환자를 침대에 눕히고, 이마를 누르며 질문을 하는 압박요법을 시행하였다. 최면을 걸지 않고도 환자의 무의식에 집중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후 많은 환자에게 압박요법을 시행하면서, Freud는 수 많은 성적인 경험들이 환자들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함을 깨달았고, 이후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언급하였다.


1. 억압된 기억은 부모 또는 성인의 성적 학대 및 폭력에서 귀인되거나, 또래 사이의 성적 장난과 관계가 있다.

2. 어린시절 겪은 트라우마는 이후 성인이 되어 영향을 미치며, 특히 사춘기 이후 히스테리 증상이 일어난다.


1896년 Freud는 ’정신분석‘이라는 말을 만들고 신경적으로 발작이 일어나는 것을 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으로 전환하려 노력하였다. 이전에 시행하던 압박요법을 진행하되, 많은 환자에게서 질문을 하지 않고 무의식을 꺼내기 위해, 떠오르는 자유로운 어떠한 말도 막지 않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를 이후 자유연상기법으로 칭하였다.

이러한 자유연상기법을 개발한 이유는 Freud의 스승 Charcot의 신경증의 치료, 특히 히스테리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최면요법과 압박요법을 사용할 때에, 환자에게 무언가를 과도하게 강요하는 것이 문제시 되었다. 자유연상을 통해 환자의 무의식을 자유롭게 떠올리는 획기적인 방법이 생겨났으나,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일부 환자는 격렬하게 저항을 보이곤 하였다.


Freud는 이러한 환자의 저항을 ’억압된 기억을 막으려는 환자의 방해공작‘따위로 여겼으며, 끈기있게 저항을 파헤치며 무의식 속 너머의 트라우마 경험을 찾으려 하였다. Freud의 이러한 치료업적을 눈여겨 보았던 Wilhelm Prieß 는 Freud와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다. 당시 Freud를 심리치료계의 이단자로 치부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Prieß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Freud의 의견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Prieß는 Freud의 비염을 수술해주곤 했다.

Prieß는 꽤나 독특한 자신만의 견해를 가졌는데, 이비인후과의로 일하던 Prieß는 성적인 병은 코의 점막의 감염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Prieß는 이후 Freud의 니코틴 중독으로 인한 심장질환을 발견하고 금연을 권고하였으나 Freud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담배를 피는 과정에서 Freud는 극심한 두통을 느꼈으나, 이내 창조적인 생각이 수면위로 떠오르곤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Freud의 치료와 연구에 있어 도움을 주었지만 때때로 Freud는 죽을것만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Freud의 유일한 목적은 과학적 성취였다. 그는 50년 넘도록 연구를 하며 목표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Freud는 자신의 자녀를 극진히 아끼곤 하였다. 40세의 Freud에게 보살펴야 하는 가족이 상당히 많았다. Freud는 생계적인 수입에 있어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였고, 자신의 휴식시간을 최대한 아꼈다. 허나 Freud를 10년넘게 괴롭힌 편두통에 시달리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며, 설상가상으로 1896년 Freud의 아버지 Jakob이 사망하였다. Freud는 이러한 정신적인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분석하며 그의 유명한 서적 중 하나인 ’꿈의 해석‘을 저술하였다.


자신의 부친의 상실로 인한 애정의 상실과 현실에 대한 적개심 속에 Freud는 자신의 꿈을 분석하며 다양한 심리적 기저에 존재하는 무의식을 분석하려 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꿈의 해석‘에 저술된 Freud의 유년기적 시절의 회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860년 내가 어린시절, 라이프치히로 여행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 어머니의 나체를 우연히 보았는데, 그 사건이 있는 이후 나는 기이하리만큼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평화롭게 잠든 어머니가 조류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던 것이다.

나는 꿈에서 깨고 나서, 곧장 부모님의 방으로 달려가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에 대해 성경에서 이집트의 무덤에 그와 같은 새의 머리를 가진 조각상이 존재한다고 본 적이 있다.

이것과 더불어 나의 친구 필립이 내게 알려준 vögeln(독일어로 성교를 의미하는 구어적 표현)이라는 단어를 알려준 것이 기억했다. 꿈 속에서 어머니가 죽은 표정은, 나의 아버지가 죽은 것과 동일한 표정이었고, 이것은 어머니에 대한 죽음의 불안이 표현된 것이라 본다.

이 꿈에서는 전형적인 어린이의 소원이 포함되어 있다. 나를 위헙하는 아버지에 대한 ‘죽음의 염원’과 나의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집착’인 것이다.


Freud가 언급한 아동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성적인 욕망은 이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독차지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허나 동시에 아버지와 같은 권위자에게 남성성을 빼앗길 것만 같은 두려움을 ’거세불안(castration anxiety)‘이라고 칭하였다. Freud의 저서 ’꿈의 해석‘에서 드러나는 특징적인 발견을 드러낸다.


1. 꿈은 우리의 내면안의 소원이 충족되는 과정이다. 꿈은 소망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지, 소망이 무조건적으로 꿈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2. 꿈 속에서 무의식 속 소망이 드러난다. 일반적인 소망은 성적인 욕망과 관련된 것이다.


즉, Freud는 꿈에서 자신의 소원이 무의식 속에 억눌려서 긴밀히, 또는 검열되어서 표현되는 과정이라 보았다. 진정으로 자신의 무의식을 알기 위해서는 꿈 속에서 드러나는 단서들을 유추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치 Freud가 살았던 거리 Vienna가 그러했듯, 그럴싸해 보이는 사람의 이면 속 뒷골목에는 성적이고 은밀한 욕정적인 단서들이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었다.


흔히 성적인 표현은 치환되어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어진다. 요컨대, ’칼, 총, 우산 뱀‘과 같은 길쭉하고 공격적인 것은 남성의 성기를 암시한다고 보았다. 꿈에서 나타나는 용어와 맥락이 무의식을 드러내는 단서라고 유추하는 꿈의 분석은 Freud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Freud는 꿈을 꾸는 것은 곧 경미한 신경증을 겪는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매일같이 꿈을 꾸진 않으나, 꿈을 꾸는 행위는 일반적인 경우로 받아들여진다.


어떻게 Freud는 꿈을 신경증과 연결하여 생각하였는가? 그에 대하여 Freud는 신경증적 증세인 히스테리의 사례, Anna O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신경증 환자는 ’무언가를 치환한다는‘ 공통점을 강조했다. 앞서 소개되었던 Anna의 경우에는 공수증에 시달리게 된 이유는 이전에 강아지가 컵을 핥는 역겨운 감정을 억누르며 그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물에 대한 신체적 발작으로 바꾸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다양한 단어로 바꾸어 꿈으로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즉, Freud에게 있어서 신경증이란 병리적인 증세가 아니라 일종의 일반적인 정신과정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허나 평소에는 이러한 과정이 자연스럽게 보이는 듯 작용할 뿐이라고 가정하였다. 이와 같은 꿈으로 드러나거나, 히스테리 증상을 겪는 사람의 근본적인 밑바닥에서 드러나는 욕망의 강력한 에너지, 인간의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소원에 대하여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이라 이름붙였다.

허나 이것이 의식의 표면으로 들어나기 이전에 이것은 현실에 적응될 수 있는 수준으로 변형되곤 하는데,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삶을 살아가는데 적합한 사회적인 인간을 만든다고 가정하였다. 이를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이라고 가정하였다.


예시를 들어보자. 만약 우리가 원초적인 상태로 배가 고픈 상태를 느낀다면 쾌락원칙에 의하여, 무언가 먹을 것을 찾을 것이다. 허나 배가 고프다고 하여 게걸스럽게 식료품점의 음식을 훔치거나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를 맨손으로 집어먹지는 않는다. 우리는 좀 더 사회적인 방법으로 ’배가 고픈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게된다. 이것이 현실 원칙이다.

즉, Freud는 무의식에서 억눌린 원초적인 본능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현실과의 타협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는 무의식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과정의 전단계읜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전의식‘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시로써, Freud는 압지(펜의 잉크를 번지지 않도록 펜을 꾹 눌러 닦는 종이)가 모자라, Lọ̈sch•papier(로슈 파피르, 독일어로 압지를 뜻한다)를 사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허나 이내 Freud는 평소 압지를 Fließ•papier(프리스 파피르, 독일어로 똑같이 압지를 뜻한다.)라고 불러왔음을 깨달았다. 이에 대해 Freud는 자신의 절친 Prieß(프리스)와의 절연으로 인하여 이전에 불러왔던 Fließ(프리스) 대신 전의식 단계에서 Lọ̈sch(로슈)로 바뀌어 왔음을 깨달았다. 이후 그의 저서 ’일상생활의 정신병리‘에서 그는 이러한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으로 인한 실수를 착오행위(錯誤行爲) 라고 언급하였다. 이는 현대에 들어서 ’프로이트의 실수 (Freudian Slip)‘ 라고 불리게 되었다.






1905년에 들어서 Freud는 ’성욕에 관한 세 가지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성욕에 대해서 긴밀히 분석하며 기존에 존재하는 기존의 성관계에 대한 인식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당시 Freud의 시대에는 성관계는 ’성적인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남녀간의 성행위‘정도로 간주되었다. 허나 만약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떠한가?


1.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성적 욕망을 느낌

2. 특정 부위나 물건에 성적으로 집착함

3. 남들의 성적인 행위나 신체일부를 훔쳐봄


이와 같은 경우 정신적으로 병리적으로 여겨졌으나 Freud는 이에 대하여 ’성욕에 관한 세 가지 이론‘에서 이에 대하여 분석하며 명백한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1. 자손을 가지는 것과 쾌락의 목적은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2. ’성적‘인 요소와 ’성기적‘인 요소는 전혀 다르다.

3. 성적 쾌감은 몸의 어느 부분에서든 얻을 수 있다.

4. 성적 본능은 성기적 활동과 상관이 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성적인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허나 있는 그대로 사회적으로 표출하지는 않는다. 이는 Freud에게 있어서 억눌리고 사회적인 요소로 치환되어 꿈으로 반드시 드러날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를 가정하게 된 명확한 계기가 존재한다. 신경증을 걸린 사람을 마치 ’성적인 욕구가 존재하는 사실‘조차 극도로 꺼려하며 강력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경증 환자는 이러한 성적 욕구 자체에 대하여 크게 저항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Freud는 성적욕구를 부정하는 신경증환자 속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어린시절의 문제가 존재함을 발견하였다. 그의 이론은 특정 어린시절에도 성적욕망이 존재하며, 성적 에너지가 존재하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였다.


1. 몸 속에서 흥분작용이 일어난다.

2. 흥분으로 응축되거나, 압박감을 느낀다.

3. 자신에게 압박되고 억제하는 느낌을 제거함으로써 쾌감을 느낀다.

4. 이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상을 찾는다.


이러한 성적 에너지를 Freud는 ’Libido(리비도)‘라고 칭하였으며, 모든 인간에게 존재한다고 가정하였다. 허나 어린 아이에게 있어서 Libido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하여 이를 정확히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 적당히 사회적으로 힘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를 Libido의 분화가 아동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특히 Freud는 Libido의 발달과정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짐을 보았다. 이를 다형태 도착이라 언급하였다. 다형태 도착이란 아동 발달 과정에서 Libido의 성적 집중이 이루어지는 신체부위가 존재하는데, 그 부위의 성적 에너지를 억압하고, 해방하는 과정을 통하여 아동은 경험을 가지게 되며, 신체부위에 집중된 Libido를 해소하면 다른 부위에 성적 에너지가 집중되는 발달적인 다채로운 양상을 표현하였다.

이후 자세히 서술되겠으나, 여기에 있어서 간단히 설명을 이루겠다.


1. 구순기(口脣期) : 젖을 빠는 입에 Libido가 집중된다.

2. 항문기(肛門期) : 배변훈련과정의 항문에 Libido가 집중된다.

3. 남근기(男根期) :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성기에 Libido가 집중된다.


이와 관련되어 남근기에 들어서며, 자신과 같은 동성과 자신과 다른 이성을 구분하는 능력을 성기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동성인 부모에게는 적대심을, 이성인 부모에게는 사랑과 애정을 갈구하게 된다.

만약 남자아이가 남근기에 들어서게 되었다면, 이성인 어머니에게 사랑을 느끼며 동성인 아버지를 위협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이에 있어서 아버지는 너무나도 강력한 상대이므로,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패배한다는 직감을 준다. 이에 대하여 아이는 자신의 남성성이 빼앗길 것이라는, 즉 남자의 상징인 남근을 제거당할거라는 무의식적 불안을 겪는다고 서술하였다. 이를 거세불안(去勢不安)이라 칭하였다.

만약 여자아이가 남근기에 들어서게 되었다면, 이성인 아버지에게 사랑을 느끼며 동성인 어머니를 위협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이에 있어서 아버지는 너무나도 강력한 애착대상이므로, 아버지가 가진 힘, 능력을 부러워하게 된다. 흔히 아동이 “커서 아빠랑 결혼할거야!”라는 말이나 “우리 아빠는 뭐든 다 해결해줘요.”라는 발언은 이러한 남성성이 가진 아버지의 권위적인 능력을 직감한 것에서 비롯된 말임을 알 수 있다. 여자아이는 이후 자신 또한 아버지와 같이 세상을 주도할 힘을 바라게 되는데, 이를 남근선망(男根羨望)이라고 한다.


남근기에 들어서게 되는 아이를 Freud는 어째서 이러한 시각으로 아동발달적 관점을 유지하였는가? 그에 대한 Hans 소년의 사례(1909)가 그를 입증한다.


5세 남자아이인 Hans는 말을 보면 공포를 느꼈다. 이는 점차 극심해져서 밖을 나가는 것 조차 극도로 꺼려하게 하였는데, 만약 밖에 나갔을 때, 말이 쫓아와 자신을 물어죽일거라는 공포심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Hans가 이렇게 된 것은 Hans의 여동생이 태어난 것이 시작점이었다.

Hans는 자신의 여동생이 태어나고 ‘난 커서 여자아이를 낳을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Hans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Hans의 여동생을 낳았고,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 말했지만, Hans는 자기 자신이 직접 여자아이를 낳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에 대해 Hans의 아버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여자 뿐이라고 단정했지만, Hans는 투정을 부리며 ‘아빠가 고추로 낳으면 되잖아!’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Freud는 이를 보고 Hans에게 남근은 창조적 에너지를 가진 Libido의 저장장소로 여겼고, 여자 아이를 낳음으로써 Libido의 해소를 바라는 것으로 짐작했다.)

Hans는 이후 자신의 성기와 아빠의 성기를 집착하며, 만지고, 관찰하고, 남들에게 드러내곤 했다. Hans가 자신의 성기를 만지며 자위행위를 흉내내곤 했는데, Hans의 아버지는 그런 짓을 하면 ‘남근을 베어버린다’며 협박했고, Hans는 ‘엉덩이로 오줌을 누면 되지’라며 웃어넘겼다.

Hans의 호기심은 이후 엄마에게 넘어갔다. Hans는 엄마의 치마를 들추고 엄마의 성기를 찾는 시늉을 하였다. Hans의 어머니는 그런 행동의 이유를 물었고, Hans는 그에 대해 ‘아빠처럼 엄마도 고추가 있는지 확인하는거야!’라고 대답했다.

Hans의 엄마는 자신은 남근이 없다고 말했고, Hans는 의아해하며, “엄마는 나보다 엄청 크니까, 나보다 더 큰 고추가 있는줄 알았어!”라고 하였다.

Freud는 이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Hans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에대해 Libido의 에너지 해소를 원한다. 허나 자신의 욕구 해소에 있어서 아버지가 “고추를 잘라버린다”는 겁박은 마치 자신의 남성성과 성별을 없애버린다는 공포를 주었다.


이에 대하여 Freud는 Hans는 매우 정상적인 Libido 발달과정에 있는 아이라고 판단하였다. Hans의 말에 대한 공포증은 거대한 성기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말을 동일시한 결과로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즉, Hans는 말을 무서워 하는 것은 직접적인 말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닌, 아동기적 환상이 만들어낸 아버지에 대한 공포인 것이로 해석했다.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Hans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Freud는 올바른 성적발달을 위해서는 아버지를 적대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고, 아동이 이후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수용적인 존재로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즉, 아버지가 자신의 성을 강탈하는 강압적 대상이 아닌, 자신과 똑같은 성별임을 인식하게 해주는 동일시(Identification)과정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Hans의 아버지에게 Freud는 “Hans 너는 자라나면서 아빠처럼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빠는 그것을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라고 지시했다. 이후 Hans는 건강하게 성장하여, 아버지와 같은 음악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자아이의 성적 성숙은 남근기에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자아이에게 있어서 성적 Libido의 동일시 과정은 다소 복잡하게 일어나는데, 남자아이가 겪는 거세공포를 겪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남근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며 이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일차적으로 여자아이는 남성에 대한 이해를 해야하며, 남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후 아버지와 자신은 별개의 존재이며, 어머니에 대해 이해를 함으로써 동일시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Freud의 관점은 양면성(兩面性), 즉 남근이라는 것에 대하여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대립적인 구도를 그려냄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양상은 똑같음을 말했다.

모든 사람은 남성적인 면모와 여성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사회에서 어떻게 발달시키느냐로 관찰하였다. 만약 남자아이가 거세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불안정한 성 관념을 가진다면, 극도로 치우친 성 관념을 가지게 될 것이다.


1) 만약 남자아이가 자신이 거세당할 것을 극도로 부정하여 무의식 속에 억압하면, 남성성을 추구하며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남성으로 자라날 것이다.

2) 만약 남자아이가 자신이 거세당할 것에 순응하여 좌절하게 된다면, 극도로 순응적이고 여성성을 추구하며 여성스러운 남성으로 자라날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을 수동적이고 가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성 차별적인 요소를 당연시 여기는 풍토가 존재했는데, Freud는 이것이 극도로 잘못된 사회적 관념이며, 인간이 평등하고 똑같은 성적 발달 구조를 가진다는 이론을 펼쳤다.

이로 인하여, 1933년 여성에 대한 강의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제가 여기서 여성에 대해 언급한 것 중에는 여성들, 또는 남성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 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이론을 완성시키기 바랍니다. 혹은 심리학이 발전하여 더욱 풍부한 설명을 드리길 기다려주십시오.”라 하였다.

Freud의 성적발달이론에 관하여 많은 여성 심리학자들은 학설을 검토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Lou Andreas Salomé, Anna Freud, Marie Bonaparte, Helene deutsche, Karen pony, Melanie Klein, Clara Thompson, Eliot Mitchell 등이 있다. 이외의 수 많은 학자들이 여성심리학자들이 이를 연구하였고, 여성의 인권에 대해 주장하게 되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Freud가 언급한 인간발달의 과정은 많은 학파를 불구하고 일반인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Freud는 이 과정에서 어린아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보고, 만지고, 보여지고, 움직이는 본능적인 충동적 욕구의 생명체라고 언급하였고, 이는 동시에 학습발달에 있어서 성적 에너지의 충분한 사회적인 해소를 기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성정 에너지를 통해 아동은 세상을 경험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이후 성적 호기심은 인간에게만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다. 동물은 성적인 본능을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며 그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하였다. 이는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이고, 인류가 발전적으로 형성되는 방향성을 제시한 커다란 기여점이 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Freud에게 있어서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란 자신의 욕구의 탐험에 있어서 금지되고, 억제되면 안된다고 여겼다. 그에 대해 Freud가 주로 접했던 신경증 환자는 무엇이 억제되어 있는가에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는 분명하게 환자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있었다. Freud의 말을 빌리자면, 신경증 환자는 “무의식적 금기사항으로 인한 희생자”들이었다.

이에 대하여 Freud는 신경증 문제의 근원점을 어린 시절에서 답을 내놓았다. 인간의 성적 에너지의 표현과 억제 사이에서 아동이 학습하는 과정에서 ’그 무언가‘를 억제 당한 것임을 직감하였고, 이를 입증하고자 노력하였다.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 사이에서 과하게 억제당한다면 그 단계에 해당하는 학습단계의 성취적인 효과를 잃고, 역기능적으로 제 기능을 못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Freud가 Hans의 사례를 통해서 얻은 성적 발달단계를 통해 깨달은 이론을 바탕으로 이전에 맞닥트린 성적인 난제에 대하여 도전하였다.


1.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성적 욕망을 느낌

이는 남근기의 성적 에너지 해소과정에 있어서 동일 성별인 부모에게 해야 했으나, 그러한 환경이 되지 않거나 에너지 해소를 동일 성별인 부모에게 부여함으로써, 같은 동성의 부모에게 동일시과정을 거친 것이다.

2. 특정 부위나 물건에 성적으로 집착함

구강기에 아이는 엄마의 젖가슴을 통해 성적 에너지를 해소하는데, 이 과정에서 충분한 모유수유, 또는 엄마에 대한 애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엄마를 대체할 또다른 ’젖가슴‘을 찾게 된다. ’젖가슴‘과 대체된 물건은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성적으로 집착하며 성적인 에너지를 부여하고, 소비하게 된다.


3. 남들의 성적인 행위나 신체일부를 훔쳐봄

아이는 남근기에 자신의 성별과 같은 부모에게 동일시 과정을 통해 성적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는데, 동일시를 올바르게 이루지 못한 경우, 타인의 성적 결합, 즉 타인의 성행위를 훔쳐봄으로써 자신의 동일시 과정을 통해 해소되야할 에너지를 대리만족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Freud의 해석은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며 유명해졌다. 단지 나쁜의미에서 말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인간성을 바닥에 내리찍었다고 비판하였고, 당시의 많은 고전적인 성적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남성의 위상을 떨어트렸다 비판했다. 가장 큰 비판은 순수해보이는 어린아이를 성적인 욕망을 가진 욕정적인 동물로 묘사한 듯한 Freud의 표현에 강렬한 반발감을 일으킨 것이었다. 허나 Freud는 이러한 비판들을 ’자신의 성적 에너지를 해소하지 못해 반발하는 반발심리‘정도로 치부해버린 듯 하다. 이후 Freud의 학설은 인류의 자존심에 타격을 준 세 번째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첫 번째 혁명은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천동설, 두 번째 혁명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닌 침팬지의 진화라고 말한 진화론이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마음과 생각을 동일한 것이라고만 치부해왔다. 허나 Freud는 이를 거부하였다.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영역에는 생각과 마음이 나뉘어 있고, 각각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을 무의식에 처박아 놓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Freud의 핵심적인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움은 인간의 본연의 축복이 아니라, 이후에 교육을 통해 획득된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당시 일반적으로 여겨지고 있던 ’인간은 고등생명체이다‘라는 전반적인 상식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Freud의 혁명적인 발표 이래, 1902년부터 수 많은 심리학자, 정신의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Otto Rank, Ernest Jones, Hans Jackson, Alfred Adler, Sándor Ferenczi, Max Eaton, Wilhelm stekel, Carl Gustav Jung, Karl Abrahame등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들었으며, 이후 1908년 4월 오스트리아 Salzburg에서 제 1회 세계적인 정신분석 모임이 열렸다.

Freud는 이후 Clark University의 학장 Stanley Hall의 초대를 받아 미국으로 Jung, Ferenczi와 함께 넘어갔다. 허나 미국에서 그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고, Freud 또한 미국 학회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1910년 Freud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상당한 문제가 생겼는데, 당시 오스트리아 정신분석 모임에서 Freud를 따랐던 많은 학자들이 Freud와의 언쟁 끝에 이론을 부정하며 Freud를 떠났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Freud를 떠난 계기는 대부분 그의 독단적이고 지배적인 성격이 대표적인 이유를 차지했다. 허나 Freud가 자신의 자서전을 Ernest Jones에게 저술하도록 하였는데, 저술된 바에 의하면, 성격 문제가 아닌 자신의 성적 본능과 무의식적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공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시 삼았다. Freud의 가장 아끼는 제자 Carl Gustav Jung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는데, Jung은 당시 신경증보다 심각하게 여겨지던 정신증의 치료에 정신분석을 도입한 의사였고, Jung은 또한 현대사회에 자주 쓰이는 말중 하나인 자신의 결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즉 콤플렉스라는 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Freud는 Jung에게서, 그리고 Jung은 Freud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Jung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기며 정신분석의 유일한 후계자라 굳게 믿고 있었다.


Freud는 정치적인 입장또한 고려한 듯한데, 많은 정신분석학파중 Freud를 지지하는 사람은 당시에 핍박받는 유태인출신이 많았던 듯 했다. Freud는 이에 대하여 Karl Abrahame에게 “정신분석이 유태인을 비난하는 표적이 되면 곤란하다” 언급하며 유태인이 아닌 Jung의 권위적인 의사로 자신의 정신분석을 널리 알려주기를 바랬던 듯 하다. 허나 Jung의 행보는 Freud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을 언급하곤 하였다.


가끔 생각하는 일이지만, 당신의 이론에는 명백히 성적인 요소를 시사하는 암묵적인 요소가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신의 이론을 혐오받아야 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싶습니다.
저의 이 혐오감은 제 유년기에 제가 전적으로 믿는 한 남성이 저에게 성폭행을 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저만의 방어기제인 듯 합니다.

-1907년 10월 28일 Freud에게 보내는 Jung의 편지



Jung은 Freud의 이론에 언뜻 회의감을 느끼는 듯 표하였으나, 그는 전적으로 Freud에게서 종교적인 신앙심을 느끼듯, 무지막지한 감명을 받았으며, 그에 대해 존경심을 최대한 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Freud는 이렇게 답장하였다.


내가 숭배할만한 사람이 아닌 것을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려고 다양한 노력을 해보려고 하오.

-1907년 Freud의 Jung에 대한 화답


이 끈끈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는 이윽고 수면 위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912년 Jung은 뉴욕 대학 연설대에서 Freud를 부정하는 연설을 했다. Jung은 Freud를 원초적으로 비난할 의도는 없었다. 허나 Freud의 기본적인 이론적인 틀을 엄격하게 수정하려 하였다.


"Freud가 전반적으로 가진 아동기의 성적 에너지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Freud의 잘못이 크다.
인간교육 및 인간발달 과정에 있어서 남근기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이 핵심적으로 사람을 좌지우지 하지 않으며, 아동이 쾌락을 바라는 것과 성적인 본능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전적인 해석적 오류를 범한다.
Libido를 단순히 성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린 Freud의 관점은 성적 본능을 과하게 확대해석한 것과 같다.”

-Jung의 포르담 대학 연설 중


Jung이 언급한 신경증의 원인에 관한 Freud의 전반적인 관점에 맹공격을 가했으며, 이후 Jung은 새로이 가진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Freud는 이러한 제자의 독립적인 행보를 과거 성폭행에 기인한 무의식적 저항, 그리고 평소에 Jung이 평소에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을 이유로, Jung의 반발을 단순한 거세불안으로 치부해버렸다.


1912년 11월 Freud와 Jung은 다시 재회하게 되었고, 서로 마주쳤을 때 이전과 다른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허나 그것도 잠시 몇 시간에 걸쳐 서로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때, 갑작스레 Freud가 실신하여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Jung은 Freud가 의식을 취할 수 있도록 침대에 뉘었다. 이후 Freud와 Jung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Ernest Jones에 의하면 Freud는 이전에도 몇 번 실신하여 쓰러진 적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Freud의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에 의하면, 자신이 혼절한 이유의 밑바닥에는 동성애적인 감정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이것이 언급한 바는 무엇인가?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Freud가 이전에 Prieß와 절연한 후 충격에 빠져 혼절한 적이 존재했다. 똑같이 Freud가 Jung과의 사이를 회복하고 술을 싫어하는 Jung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는데 성공하고(아마 이것을 서로의 관계회복의 증거라고 여긴 듯 하다) 술을 건배하며 축사를 들 때 혼절하였다.

Prieß와 Freud의 절연은 표면적으로는 Prieß와 Freud의 성적 이론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인한 다툼이였지만, Prieß에게서 어머니에게 바랬던 전적인 친구와도 같은 우정을 바랬던 듯 하다. 이에 대해 “Prieß에게 나의 여성적인 면모가 우정을 갈구한다”고 언급했지만, 일반적인 우정을 원했다고 가정하기엔 각별했던 서로의 사이가 틀어진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추측으로 Prieß에게 친구 이상의 과한 애정을 바란 듯 하다.


Prieß와 같은 이유로, Jung에게서도 제자 이상의 관계를 바란 듯한 Freud에게서 융은 강력한 거부감을 느낀 듯 하다. 이 일을 계기로 잠깐이나마 회복되었던 둘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912년 12월, Jung은 정신분석학파가 뿔뿔히 흩어진 것은 당신의 고지식한 아집 때문이라고 편지를 통해 Freud를 맹비난하였다.


1913년, Freud는 ’토템과 금기‘를 저술하였다. 이 책이 Jung과의 관계를 완전히 떨어트릴 것을 알고 있었지만, Jung의 이론이 자신의 ’아동의 오이디푸스 발달‘의 평판을 전반적으로 깎아내린다고 여겼다고 생각하였다. ’토템과 금기‘를 통해서 Freud는 자신의 ’오이디푸스적 근친상간‘의 개념을 강력히 주장시키기 위해, 인류의 기본적인 기원까지 올라갔다. 어째서 인류는 근친상간에 대해 암묵적으로 혐오하고 금기시하는가? 이에 대하여 Freud는 원시적으로 같은 ’토템신앙‘을 믿는 부족끼리의 결혼이 금지된 사례를 통해 근친상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을 당연시 하려고 노력하였다.

Freud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근친상간의 금기의 목적이 ’생물학‘에 기반된 것이 아닌 ’사회학‘에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성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인간의 대화의 방법의 일부이자, 문화간의 소통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Dawin이 언급했던 기본 원숭이 무리에 가부장적인 수컷과, 주변에 그를 따르는 암컷 원숭이들이 구성되어 있다 주장했다. 이에 덧붙여 Freud는 수컷 우두머리를 항시 잡아먹으려는 어린 수컷들이 같은 동성을 혐오하며, 모든 암컷은 차지하려 한다는 가정을 덧붙임으로, 자신의 이론이 가진 동성애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과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성적발달이론을 입증하려 노력했다.

Freud는 자신의 이론이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허나 이러한 Freud에게도 묘한 이론의 빈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Jung이 비판하였듯, 만약 성적인 욕망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어째서 신경증 환자들은 그토록 성적 본능을 거부하려 드는 것인가? 만일 인간의 본능이 전부 성적인 요인에서 귀인한다면, 어째서 우리는 성적인 것을 억압하려 들고, 그것을 모른 체 하는 것일까? 성적욕망을 억압하는 원초적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Freud의 이론에 따르면 오직 성적본능만이 존재하며, 성적 본능을 억압하는 것은 오로지 성적인 이유에서 귀인되어야 했다. Jung은 이에 대해 식욕과 같은 성적이 아닌 본능도 명확히 존재함을 짚었고, Freud는 이를 허기짐과 갈증과 같은 것은 자신을 지키려는 삶의 본능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는 Jung에게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고, Freud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Freud는 자신의 이론을 다시금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것은 이론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치료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실제적으로 환자가 성적인 요소를 갈등하고 전면적으로 억누르는 이유에 대해 정교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Freud는 정신치료의 문제점을 찾기 시작했다. 정신치료의 성공여부는 환자 마음 속 강력하게 억누르는 힘을 무찌르냐 마느냐에 달려있었다. 치료자에게 반항하는 이 힘은 얼마나 강력한가? 그리고 어디서부터 귀인한 것인가? 신경증에서 비롯되는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어떻게 해야 환자는 자신의 무의식 속 성적요인을 인지하는가?

Freud는 이내 환자에게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는 억압된 감정이 의식 밖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수학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지,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난해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에 있어서 과정은 생략하고 답만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과연 우리의 마음은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일까?


레스토랑의 화려한 음식 메뉴를 쳐다본다고 해서 마음 내적 욕망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고 소화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Freud는 환자의 무의식 속 성적욕망을 의식 밖으로 꺼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 꺼내느냐? 어떻게 의식 밖으로 자신이 모르는 욕망을 뉘우치게 하느냐? Freud는 이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던 이전의 Anna O의 사례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 사례가 분명 자신의 이론의 해답을 이끌어내는 단서가 될 것이라 생각한 듯 하다.


1914년, Freud는 환자가 치료자에게 느끼는 감정인 전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단순히 Anna O가 치료자에게 성적 욕망을 느꼈듯이, 환자의 감정이 치료자에게 나타내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환자에게 나타나는 강력한 저항을 이기기 위해 표면 위로 강력한 힘을 꺼내고자 하였다.

허나 이는 쉬운 방법은 아닌 듯 했다. 환자의 사랑의 애정은 쉽게 적대적인 감정으로 뒤바뀌기도 했고 일반적인 감정보다 매우 불안정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Freud는 이 불안정한 상태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치료도구로 보았다.

분석을 진행하던 어느시점부터 치료자에게 환자는 강력히 반발하며 나섰다. 이전에 치료를 진행했던 환자 중, 신경증으로 인한 29세 장교는 사람의 목을 칼로 베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러한 충동에 위헙한다고 치료를 의뢰했다.

치료과정에서 Freud는 장교의 무의식을 해석해주기 시작했고 일정 경과에 다다르며, 장교는 치료를 거부하며 Freud를 “당신이란 종자는 내 같잖은 아버지와 똑같이 내 성생활을 관여하려 든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Freud는 그 이유에 대해 물었고 “자신이 얕보이는데, 태평히 누워있을수 있겠느냐?”가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Freud는 이에 대해, 장교의 반발심은 마치 아버지가 자신을 성적으로(거세불안으로 인하여) 자신을 관여하지 않을까에 대한 공포가, 치료자인 Freud에게 감정이 옮겨져 있음을 파악했다. 이후 장교는 그러한 감정에 대해 인정하고 Freud가 마치 아버지처럼 공포스럽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와같이 부정적인 감정의 전이또한 치료의 핵심적인 역할을 Freud는 보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Freud는 치료자에게 느끼는 환자의 감정이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의 재현‘이라고 보았다. 즉, 신경증 환자는 억압된 감정이나 생각을 떠올리기 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하듯 똑같은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Freud는 이를 놓치지 않고, 치료자는 환자에게 트라우마의 이야기를 재생하며, 그 감정선을 꺼낼 수 있도록 해야한다 주장했다. 이는 치료과정에서 느끼는 무의식적인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맥락‘을 반복되는 트라우마 경험 속에서 느껴지는 치료자에게 향해지는 ’강한 감정‘이 나타나도록 꺼내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신경증 환자의 성적 억압요인은 과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암묵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치료자는 트라우마의 부정적 감정을 치료자에게 쏟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전이를 통해 신경증을 치료한다 보았다.


허나,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치료는 매우 고된 길로 빠지게 될 것이다. 환자가 어떠한 감정의 단서를 가지고 있는한, Freud는 그 실마리를 찾아 원인을 꺼낼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치료자에게 어떠한 애정도, 적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Freud는 이를 ’어떠한 감정도 없는 것‘이 아닌 ’어떠한 감정도 가지지 않는 것이 편한 것‘이라 해석했다. 모든 감정을 버리면 남는건 오롯이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전이가 존재하지 않는 환자는 자신만을 사랑하며, 자신과만 의사소통하는 즉, 자기애성 신경증(나르시스트적 요소에 의한 질환)이라 여겼다. 우리 모두는 어느정도 자기애적인 면모를 보인다.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믿고 좋아한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타인과 하며 교류하며 좋은말, 나쁜말을 하곤 한다. 대화하기를 포기한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멋진 면만 바라보며 자기 스스로 사랑을 추구하며 완벽한 모습인 양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본다면 Freud에게 있어서 아동이 마치 ’자기 자신이 전부인 줄 아는 어린아이의 생떼‘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그런 아이는 자신만을 전적으로 사랑하며, 어머니를 거울삼아 의사소통을 배워가야 한다고 보았다. 마치 Freud가 어린시절 Cromwell과 Hannibal 장군을 흠모했던 것처럼, 아동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에 강력히 집착한다고 보았다.


강한 자기사랑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갑옷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함에 있어서 갑옷이 너무 무거우면, 때로는 성장을 방해하는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서 갑옷안에서 살아갈 순 없으며, 결국은 나의 바깥에서 사랑을 받으며 상호작용을 해야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도한 자기애는 Libido의 역전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흔히 성적 에너지가 집중된 신체부위의 에너지 해소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오롯이 자기자신의 성적 에너지를 해소함에 있어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만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Freud는 위와 같은 경우, 신경증과는 대비되는 과하게 퇴행된 유아적인 면모를 관측하였다. 심각한 망상, 혼란, 환청, 우울증, 과대망상 등 ’머리는 아동이나 몸은 성인‘인 사람들이 되었다. 이러한 경우를 신경증과는 대비되는 정신병적인 성격이라 여겨 전이가 일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그 이유는 정신증에서는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과정인 전이과정을 전혀 모르는 자기애적인 편협한 의사소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Freud의 이론을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었따. 앞서 Jung이 언급했던 허기짐과 같은 살고자 하는 삶의 본능은 그럼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Freud는 ’우리의 욕망이 전적으로 성욕에서 비롯된다고 가정한다면, 성욕을 억제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의문을 품었다. 이것은 Freud의 미해결 과제이자 성적발달이론의 숙제였다.


바로 그 무렵,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Freud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을 지지했으나 몇 년이 지나고, Freud는 전쟁에 전반적인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으로 드러나는 원초적인 인간의 악한 모습과 문명의 전반적인 퇴보에서 Freud는 거부감을 느꼈다.

1917년, Freud를 비롯한 Vienna의 시민들은 전반적으로 궁핌한 삶을 보내기 시작했다. 극도로 식사를 굶으며, 난방이 되지않는 춥디 추운 겨울을 보냈다. Freud는 상당한 애연가였는데, ’가장 최악의 상황은 담배 하나 없는 것‘이라 하곤 했다. 이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은 전쟁에 패하여 2년에 걸쳐 전쟁에 대한 국가적 보상 및 국민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인플레이션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Freud는 모든 자금을 탕진했고, 환자들은 거의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다.


고통스러운 생활속에 Freud는 병세마저 심해졌다. 죽을정도로 힘든 상황속에서 자기애성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며 ’애도와 우울(1915)‘을 집필하였다. 이후 1915~1918년 자신이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본능에 대한 이론을 해결하기 위하여 두 가지 이론을 ’죽음의 본능(1918)‘에서 저술하게 된다.


1. 인간의 모든 행동은 1차적인 욕망에서 비롯되는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쾌감원칙‘ 그리고 2차적인,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활동으로 욕구를 억제하는 ’현실원칙‘을 가진다.

2. 욕망과 억제 사이, 모든 인간의 행동은 긴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움직인다.

만약 ’죽음의 본능‘에서 저술된 바와 같이 긴장의 증가는 불쾌한 것이고, 흥분의 해소는 좋은 일이라면 이해가 안되는 심리적 행동양상이 존재하게 된다.


만약 자신을 자해하는 우울증 환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스스로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 것은 흥분의 해소라고 하기 보다는, 사람을 위태로운 상황으로 밀어넣는 긴장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아닌가? 당시 전쟁으로 인하여 생기는 전쟁후유증인 Shall Shock반응을 일으키는 군인이 많았다. 폭탄과 죽음의 공포를 눈 앞에 두고, 스스로 더욱이 긴장하며 벌벌 떨며 사지가 마비되는 이러한 경우는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Freud는 이러한 반박을 ’외부 폭탄 및 총격의 소음으로 인한 불안의 증가일 뿐, 스스로 불안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 허나 이를 반박하듯, 수 많은 Shall Shock 환자들은 꿈 속에서 공포적인 꿈들이 수 없이 나타나며 불안함을 나타냈는데, 이전 Freud가 꿈은 1차적인 억압된 무의식을 표출하는 통로라고 하였다.

만약 Freud의 꿈에 대한 가설이 맞다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지 못하고 억압하여, 전쟁상황에서 Freud와 가설과는 다르게 자신의 긴장과 불안을 증가시키는 감정을 전쟁상황에서 자꾸만 억압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는 모순되는 말이며, 애초에 문맥적으로 올바른 말이 아니었다. Freud는 혼란에 빠졌다.




Shall Shock에서 보여지는 불안이 무의식중에 억압되고 있다는 것은 Freud에게 “분명 인간은 1차적인 쾌감을 만족시키려 하는 존재이고, 만약 사회적으로 옳지 않은 행위라면 억압이 되는 것”이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성적인 것이 아닌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쟁 후유증을 앓는 병사에게 나타나는 것인가?

Freud는 ’쾌감원칙의 피안(彼岸)‘에서 Shall Shock와 같은 자신의 성적욕구이론에 벗어나는 충격적인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려 하였다.

저서에서, Freud는 트라우마에 대하여 설명하길,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에 대해 대비를 하길 바라는데, 갑작스런 충격이 일어나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미리 신경증세와 패닉에 빠지며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즉, 매를 맞기 전에 어느 정도 불안을 겪는 아이는 매를 맞으면서 고통스러워 하되 이후 삶을 살아갈 수 있으나, 예고 없이 매를 맞은 아이는 상황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아 방어적으로 상황판단을 위해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병적인 강박증세, 그리고 Shall Shock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내놓았는다. 많은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자해를 하거나, 불안에 떠는 모습은 마치 ’예고 없이 총에 맞기 전에 미리 매를 스스로 맞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극도로 심해졌을 경우,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세우는 경우가 존재했다. 그에 대하여 Freud는 살고자 하는본능 것과는 반대로, 죽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죽음이라도 인간에게 있어서 좋을 리는 만무하다. 이는 평소에 자신이 “계획한대로 평화롭게 죽기”를 위하여 있는 힘껏 억눌리며 반대로 삶 본능을 자극시킨다.

만약 한 명의 수명이 계획대로 다해간다면, 죽음본능이 나타나며 죽음을 택한다. Freud는 이를 강을 거스르는 연어에 비유했다. 연어는 태어나서 먼 바다로 떠난다. 이것은 삶 본능이다. 허나 연어는 동시에 어른이 되면 다시 자신이 계획한 장소에서 죽고자 있는 힘껏 살아간다. 죽음을 위해 살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다. 태어난 곳에 알을 낳기위해 돌아온 연어는 죽어간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종족을 지키며 유지한다는 Dawin의 이론이 Freud에게 영향을 어느정도 끼쳤는데,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개인의 만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가문의 종속을 위하여 때가 되면 죽는다는 관점이 이러한 Dawin의 이론적 배경이 녹아들어가있다.


1920년, Freud 딸 Sophie가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3년 후에, Sophie의 아들이 4살 무렵 죽었다. Freud는 죽음의 이론을 발표한 가운데,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라, Freud 또한 죽음의 위기 속에 놓여있었다. 구강암으로 인하여 Freud는 수술을 30여회 넘게 받으며 턱과 입 천장을 도려내기도 해쏙, 이로인해 언어 구사에 문제가 생겼으며, 청력이 악화되었다.


1923년 Sophie의 아들을 죽음을 뒤로하고, Freud가 길게 의문을 끌었던 “성적 억압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Freud는 자아, 원초아, 초자아 세 가지 구조로 인간의 정신구조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1930년에 들어서 유태인을 억압하는 히틀러의 등장으로 독일은 혼란에 빠졌고, Freud 또한 그러했다. 나치는 Freud를 비롯한 자신에 반대되는 많은 서적을 불태웠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며, 나치 호위대는 Freud의 집에 금품을 요구했고, Freud는 그들을 내쫓았다. 이로인해 그의 딸 Anna는 하루종일 게슈타포(나치의 비밀경찰)에 하루종일 구속되어 Vienna를 떠나자고 Freud를 설득했으나, 완강히 거절하며 떠나지 않는다고 고집했다. 석 달이 넘도록 나치에 접근하여 Freud 가족은 도망치도록 나치군을 교섭했고, 1933년 Freud와 가족들은 영국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Freud는 연구를 계속했으나 암으로 인하여 1939년 9월 23일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고, 그녀의 딸 Anna는 죽음의 순간까지 Freud의 곁을 지키며 병상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Anna는 추후 방어기제와 관련해 Freud의 뜻을 잇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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