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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무표정_용식이 아저씨

by 정유철

정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몰아서 보는 내내 재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특히 세 번째 영상에서 본 할머니는 군인들이 마을을 통째로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분도 재윤 할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했다.

“온 마을이 재가 돼서 휘날리는데 눈이 오는 것 같았어. 다 타버리고 사라졌지.”


정하는 재윤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여수에서 왔다는 말을 떠올리며, 낮에 방문했던 동굴이 기억났다. 녹슨 철문 안으로 한기가 차있던 곳. 팔에 소름이 돋았다.


재윤 할아버지의 채록 파일을 열어 할아버지의 나이를 확인했다. 할아버지가 83세, 유체이탈 꿈을 7살에 꿨다고 했으니 76년 전. 76년 전은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던 해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정하는 넋이 나가서 여러 포털사이트를 오가며 ‘여순사건’을 검색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날의 증언들과 자료들을 보다가 재윤 할아버지 채록 자료 타이핑 파일을 다시 열어 읽어봤다.


할아버지가 분명히 꿈이라고 했는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다시 읽어보니 재윤 할아버지는 명확하게 꿈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며칠 동안 영혼이 몸 밖을 돌아다닌 경험이라는 말만 했다.


‘말할라고 보니까 그게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 그런데 너무 생생해서 평생 잊은 적이 없어.’


2012.12.3.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 이재윤 / 추가 영상본


형님이 달리고 있는 저 너머에는 마을이 불에 타는 연기가 자욱했거든. 형님 같이 가, 같이 가하면서 달렸는데도 형님은 내 소리는 못 듣고 계속 달렸지. 여기까지가 혼이 몸을 떠난 동안의 이야기는 끝이야.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그때 형님을 따라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형님은 안 보이고 용식이 아저씨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더라고. 우리 마을 하고는 떨어진 곳이었어. 아저씨 말로는 내가 계속 잠만 자서 죽은 줄 알았대. 마을이 다 타고 있어서 아저씨가 식구들 데리고 피하다가 우리 집 마당에 내 신발만 있길래 들어와 봤더니 내가 자고 있길래 들쳐 업고 식구들이랑 피했다고 했어.

내가 며칠 동안 계속 잠만 잤다고 했는데, 난 방금까지 달리기 하던 사람처럼 숨이 차고 가슴이 뛰었어. 분명히 방금까지 형님을 따라서 뒤에서 발을 휘저으면서 달리고 있던 게 꿈같지가 않았어.

우리 엄니, 아부지, 형님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더니 다 죽고 없대. 내가 우리 형님은 마을로 달려들어왔다고 했더니, 마을로 왔으면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라고 했어.

내가 그래도 형님 찾으러 간다 하니까 용식이 아저씨가 죽은 사람들 전부 만성리로 옮겨다가 묻었는데 가도 못 찾을 거라고 했어. 다 타버려서 못 찾는다고. 그런데도 난 자꾸 눈물이 나서 우리 집에 갈 거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어.


난 너무 서러워서 용식이 아저씨를 올려다봤는데 아저씨 눈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어.

우리 마을 이제 없다고 이 놈아. 저기 안 보이냐, 다 타버려서 아무것도 안 남았어야. 하면서 아저씨가 우는데, 아저씨 뒤쪽으로 보이는 우리 마을이 시꺼메져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야. 저런 게 우리 마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더라고. 하도 울어서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나.


용식이 아저씨네 식구랑 며칠을 걷다가 아저씨가 나만 혼자 배에 태워줬어. 배 타고 들어가면 근처에 고아원이 있으니까 가서 밥 주라 하고 거기서 잘 살라 했어.

들어가서는 어디서 왔고, 식구들 이름이 뭔지 절대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했어. 이제까지 있었던 일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그냥 밥 잘 먹고살아있으라고 했어. 아저씨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으니 여태까지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살았지.

아저씨 말처럼 다 잊고 살라고 했는데, 어디서 온 지도 이름도 잊어버리라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지.

어쩌다 이라고 됐을까. 혼이 몸에서 나와가지고 나만 살아남은 거야. 며칠 동안 잠만 자고, 잠만 자는 사이에 식구들이랑 마을이 홀라당 타버렸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라면 편하고.

그래도 우리 식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 우리 형님, 아부지, 엄니 너무 생생한데 어떤 게 꿈이라고 할 수 있겠어. 옆집 살던 내 친구 일순이, 건넛집 정범이 아저씨, 마을 사람들, 나 살려준 용식이 아저씨, 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살라고 했는디 그럴 수가 없어. 내 가족들이야. 너무 생생해.


영상 속에서, 허공만 떠돌던 재윤 할아버지의 시선이 정면에 있는 문교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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