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는 덩치 큰 경비원이 차 문을 두드리는 상상을 하며 덜컥 겁이 났다. 결국, 노크 소리를 듣기도 전에 차에서 내렸다. 다가오는 주은이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뭐야?”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때 가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정하는 대답할 틈도 없이 가이드의 다음 말을 들었다. “이 친구 보호자 되시죠?” 뉴스에서 보던 앵커처럼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에 정하는 또 한 번 놀랐다.
“저희는 다크투어리즘이라는 여행 프로그램 중인데 이 학생이 함께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요. 이모님 맞으시죠? 괜찮으시면 같이 들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이모라는 말이 웃겼는지 주은은 옆에서 얼굴을 돌리고 큭큭거렸다. 가이드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정하의 동의를 구했다. 별일은 아니구나 싶었던 정하는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에 더 늦게 복귀하려는 주은의 속셈이 얄미워서 가이드를 따라가는 길에 주은의 귓불을 꼬집었다.
주은과 정하는 여행객들이 두 줄로 서 있는 곳에 가서 맨 뒤에 줄을 섰다. 공장 입구 옆쪽으로 줄지은 무리가 걸어갔다. 공장 옆쪽에 동굴 앞에 서서 가이드가 설명을 시작했다. 앵커 같은 이 여자는 자신을 문화관광해설사라고 소개했다.
주은은 어느새 맨 앞까지 치고 나가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줄지어 있던 사람들이 해설사 주변에 동그랗게 서게 돼서 맨 뒤 쪽에 정하 혼자 덜렁 남게 됐다. 해설사가 마이크로 해설을 하고는 있지만 웅성대는 관광객들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진 않았다.
그러다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이 정하의 눈에 들어왔다. 정하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건 포기하고 안내판을 찬찬히 읽었다. 안내판을 다 읽지 못했는데 해설사와 사람들이 줄지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정하는 맨 앞에 주은이 들어가는 걸 확인한 후 본인도 줄의 맨 끝에 서서 입구로 들어섰다.
동굴에 들어서자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천장도 높지 않아서 키가 큰 남자 여행객들은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이동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조명이 켜놔서 보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꽤나 으슥해 보이는 곳이다. 동굴 속은 길게 이어져 있고, 안에서 해설사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서 맨 뒤에 있는 정하에게까지 전달되진 않았다. 다만 아까 안내판에서 읽기로는, 이곳은 여순사건 당시 14연대 주둔지의 무기고라고 쓰여 있었다. 무기고였으면 여기서 죽은 사람도 혹시 있을까 하는 으슥한 생각이 들었다. 오싹해진 정하는 앞사람에게 좀 더 바짝 붙어서 쫓아갔다.
긴 줄을 졸졸 쫓아가며 여순사건에 대해 검색해봤다. 여수와 순천에서 있었던 일이라 여순사건이구나 하며 정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니. 정하는 역사 수업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는지 되짚어봤다.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시험에는 안 나왔던 게 분명하다.
정하는 동굴 투어가 끝나고 관광버스가 있는 곳으로 주은을 데리고 갔다. 해설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건네자 주은이 끼어들었다. “다음은 어디로 가요? 저희도 가 있어도 될까요?” 정하는 주은을 잡아당겨 말렸다. 가이드는 그런 주은을 보며 웃었다.
“주은이라고 했지? 오늘은 잠깐 설명을 들은 게 전부지만 집에 가서 꼭 다시 검색해봐. 역사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거야. 잊지 않으려면 알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해.”
정하는 주은을 학교에 내려주고 이모 집에 차를 반납한 후 자취방에 돌아왔다. 저녁을 후딱 먹고 과제를 해야 한다. 과제 같은 일과는 미리 해놔야 갑작스럽게 채록 자료 타이핑 요청이 와도 여유 있게 일을 할 수 있다.
정하는 납작한 접시에 뜨겁게 데운 햇반 하나와 이모네서 가져온 반찬을 몇 가지 담아서 상에 올려놓고 앉았다. 노트북 앞에 놓인 접시 위 음식을 집어먹으면서도 정하의 시선은 노트북을 향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지난번 재윤 할아버지 타이핑 자료에 오타가 있는지 점검만 하면 된다. 은정이가 말할 때는 기한이 3일 남았다고 했지만, 문 교수님께서 급한 건 아니니 일주일 내로만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문 교수는 다른 학생들은 늦는 경우가 종종 있어 제출 기한을 앞당겨 말하곤 한다. 하지만 기한을 딱딱 지키는 정하에게는 여유 있게 기한을 준다.
정하는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들에 올라온 새로운 영상을 차례로 봤다. 유튜브를 다 본 후에는 인스타그램을 켜서 친구들이 올린 게시물이 뭐가 있나 클릭해봤다. 볼만한 건 다 봤는지 결국에는 연예계 인터넷 기사까지 모두 읽고 나서 정하는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그런데도 온라인 속 클릭을 멈출 수 없던 정하는 관심도 없는 인터넷 기사를 몇 개 읽다가 낮에 만난 앵커 말투의 해설사가 생각났다.
다크투어리즘이 뭘까 검색해봤다.
/다크투어리즘 - 재해지, 전쟁 철거지 등 인류의 죽음이나 슬픔을 대상으로 한 관광.
정하의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슬픔을 대상으로 한 관광’이라니. 이제 슬슬 일을 해볼까 하는데 메일함에 새 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떴다. 새로운 일거리일까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교수님에게서 온 메일이다.
- 정하야. 지난번 이재윤 씨 채록 영상 자료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추가로 보낸다.
가끔 추가 영상을 보내주는 경우가 있다. 파일을 다운받아서 확인해보니 3분 50초. 짧은 영상이라 안심이 됐다. 오늘은 일찍 잘 수 있겠다. 좀만 더 쉬다가 시작해볼까.
인터넷 기사도 다 읽은 정하는 다시 유튜브 홈페이지로 돌아왔다. 어느새 알고리즘을 탔는지 여순사건 관련 영상이 떴다. 여수 지역 방송국에서 제작한 여순사건 특집 영상을 눌러봤다. 십 분 남짓하는 특집 영상이 네 개 정도 되는 걸 정하는 쉬지 않고 몰아봤다. 추가로 온 채록 영상 자료가 생각나서 영상을 꺼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각 영상마다 여순사건 생존자 인터뷰가 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모든 영상을 끝까지 다 보게 됐다.
정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몰아서 보는 내내 재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특히 세 번째 영상에서 본 할머니는 군인들이 마을을 통째로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분도 재윤 할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했다.
“온 마을이 재가 돼서 휘날리는데 눈이 오는 것 같았어. 다 타버리고 사라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