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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철 Sep 24. 2024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면 글을 그만 쓰게 될까? 만약 그렇게 되면 오후에 혼자 카페에 앉아 있을 때, 나는 혼자 무얼 하고 있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글을 쓰는 건 내 할 말을 쓰는 행위가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내 마음을 전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묻는 것이고, 공감하는 내 마음을 다시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글 쓸 소재가 떨어질 리가 있을까.

조용했던 여수수산시장

올여름, 나 자신에게 스스로 미션을 줬다. 새로운 글을 써보자. 책이 출간되고 이제는 무슨 글을 쓸까 하던 차에 아는 누나가 문학상공고를 보내줬다. <여순 평화문학상>, 내키지 않았다. 나는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 거부감이 들었다. 과연 내가 어떤 역사 소설을 쓸 수 있으며, 누구의 마음을 위로하겠는가. 

모든 앞날이 정해져 있다고 믿진 않지만, 그래도 난 운명을 믿는다. 가끔 내게 자꾸 다가오는, 필연 같은 일들이 있다. 이 문학상이 그랬다. 다른 공모전을 찾는 중에 마땅한 게 없었고 이 공모전 정보를 알려준 누나와 우연히 교회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요즘은 어떤 글을 쓰냐는 질문에, 지난번 보내준 문학상을 고민하고 있다고만 했다. 

이대로 해프닝으로 넘기기에는 마음에 걸려서 여수에 한번 가보기로 결정했다. 여수에는 다크투어리즘이란 게 있는데, 여순사건 관련 장소들을 해설사와 함께 투어 하는 프로그램이다. 투어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염전 일과 자꾸 시간이 겹쳐서 끝내 직접 운전하며 한 군데씩 돌아봤다. 

엄마와 닮은 분의 뒷모습

여순사건 장소들을 돌아다닌 후에는 카페에 앉아 여순사건 특집 다큐멘터리와 생존자들 인터뷰를 한참 동안 봤다. 그리고 소재를 찾았다. 소재를 찾고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영감과 감정의 성을 쌓아 올리는 여러 순간들이 있었다.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을 때 엄마랑 뒷모습이 똑같이 생긴 분을 봤다. 너무 신기하리만큼 닮아서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친절하고 씩씩했던 게하 사장님과 여행객들

여수에서 만난 친절했던 사람들 덕분에  복잡했던 감정들이 좋은  영향을 받았다.

펜션을 가기에는 부담이 돼서 갔던 게스트하우스, 이곳은 사장님은 친절하고 씩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장님 만큼 씩씩하고 떠들썩했던 다른 여행객들도 만날 수 있었다. 

혼자 이순신광장 근처를 걸어 다니다가 한적한 부둣가에서 발견한 조용한 식당. 주방에서 나와 스테이크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시던 아저씨 사장님. 그 덕분에 밤산책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스테이크 굽는 사장님이 친절했던 곳

여수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이곳이 좋아서 여수를 소재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역사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없는 내가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당신의 무표정>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주인공 '정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타이핑알바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진 않는다. 빨리 타이핑을 해야 일을 마치기 때문에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고 빠르게 받아 적기만 한다. 그러다 어린 시절 며칠간 유체이탈을 한 덕에 식구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이야기가 사실일지 궁금해하다가 결국 주인공 정하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고 몰입하게 된다.

‘글을 잘 쓰고 싶다.’ 첫 책이 출간되고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그래서 해보지 않은 일을 해봐야 한다고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하고 나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내 생각이 맞았다. 소재를 찾아 돌아다녀보니 또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됐다.


누군가 글은 언제 쓰냐고 물은 적이 있다. 감정과 영감이 마구 솟구치는 밤이나, 센치해지는 가을에 글이 잘 써지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NO'다. 

냉정과 열정 사이 어딘가에 있을 가장 글 쓰기 좋다고 답해주고 싶다. 

앞으로도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어딘가에서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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