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내분께서는 '걷기'라는 활동을 하고 계신다. 아이들 때문에 친해진 엄마들 중 몇 명이서 아침마다 10000보 걷기에 도전 중인듯하다.
덕분에 아침풍경이 미묘하게 변했다.
원래는 알람에 맞춰 나 혼자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출근준비를 했다. 절반쯤 준비가 됐을 무렵 효니를 깨우고 후다닥 등교준비를 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학교 건물 앞에서 안아주고 파이팅 하고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출근하는 게 루틴이었다. 혀기 어린이집 등원은 한 시간 정도 더 여유 있어서 아내분과 알아서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아내분께서 걷기를 실행하면서 혀기의 등원이 한 시간 빨라졌다.(어린이집은 등원시간 조율이 가능하더라.)
그래서 아침시간이 부산스러워졌다. 둘이 동시에 깨어나니 서로 장난치느라 준비가 더디다. 나는 시간약속에 심각하게 민감한데 이 녀석들은 여유 만만이다. 혹여나 늦을까 봐 속이 타들어가는구먼 한 녀석 옷 입히면 한 녀석이 사라지고, 없는 녀석 찾아오면 한 녀석이 또 사라져 있다. 누가 보면 우리 집이 개마고원만큼이나 넓은 줄 알겠다.
어찌어찌 옷만이라도 입히고 끌고 나오면 혀기녀석 걷는 모습이 가관이다. 어느 집 양반이라도 된냥 품위 있게 천천히 걷는다. 속 터져 증말!!
효니는 괜찮다. 혀기랑 나오면서 이전보다 10분 빨리 집에서 나오기에 여유가 있다. 당장에 급한 건 셔틀버스를 타야 하는 혀기인데 당사자는 고귀하신 발걸음을 함부로 놀리는 일이 없다. 손을 잡고 "뛰어!"라고 말하면 뛰는 시늉만 하고 속도에 변화가 없다. 경보를 해도 빨라지기 마련인데, 어떻게 뛰는 자세로 이렇게 느리게 갈 수 있지? 전날 밤 내가 화낸 건 없는지 기억을 더듬어본다. 골탕 먹일 속셈이 아니라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말이 안 되지.
혀기와 함께 나오면서 효니는 반대로 빨라졌다. 사실 효니랑 둘만 나올 때 효니 발걸음이 딱 저랬다. 만날 지각하면서도 절대 뛰지 않는 녀석인데, 혀기랑 밍기적거리고 있으면 혼자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간다. 쟤가 저렇게나 빠른 녀석이었나? 같이 가자고 부르면 세상 시크하게 흘겨보고서는 제 갈길 간다. 야야. 누가 보면 싸운 줄 알겠다. 거참 화목한 가족일세.
효니가 걸어가는 방향 저 뒤에서 혀기의 셔틀버스가 오는 게 보이기 대문에 차마 따라가진 못하고 뒷모습만 바라본다. 이게 참. 내심 서운하다. 생각 같아서는 초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 항상 등굣길에 함께 해주고 싶었다. 뭔가 로망 같은 그런 거 있잖아. 효니가 친구들한테 부끄럽다고 그런다면 몰라도 이변이 없다면 그래주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홀로서기를 맞이한 기분이다.
최근 며칠 이런 상태였다가 오늘 등굣길엔 아내분께서 친히 동행해 주셨다. 함께 걷는 엄마들이 애들 등교시켜 주고 바로 출발하자고 학교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그래서 오늘은 효니와 함께 멀어졌다. 이거 이거 참 도움 한 개도 안되네 증말. 이왕 함께 나온 거 각자 한 명씩 손잡고서 함께 가는 그림을 상상했는데, 마치 애 데리고 떠나는 사람 같잖아...
혼자 혀기를 셔틀에 태워 보낸다. 그나마 애교 많은 아들내미가 자리에 앉아서 끝없이 손하트를 날린다. 나도 떠나는 모습에 작은 손하트를 날리며 배웅한다.
하아... 이제 혼자다.
어? 아니. 바로 앞에서 혀기 셔틀이 신호에 걸렸다. 냉큼 뛰어가서 혀기에게 다시 인사를 보낸다. 손을 흔들고 하트를 날려보지만 쳐다보지를 않는다. 아빠랑 헤어지는 아쉬움 같은 게 1이라도 남아있다면 창밖을 쳐다볼 법도 한데, 뭐에 홀린 사람 마냥 앞만 보고 간다. 너 아빠한테 하트 날려줬었잖아... 정말 좋아하는 거 맞니? 다시 씁쓸해진다.
조금 지나니 아내분께서 황송하게도 카톡을 하사하신다. 냉큼 확인해 보니 사진이다. 폰 속에는 버스 안에서 반가워하는 혀기의 모습이 찍혀있다. 걷다가 혀기 셔틀버스랑 동선이 겹친 모양이다.
타자마자 따라잡은 나한텐 미련도 없었으면서, 지 어미는 잘도 발견하네. 흥!
혹시 내가 옆에 있는 거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안 본 거였을까?
여러모로 씁쓸한 출근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