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정체불명의 하얀 벌레가 나타났다. 쌀알 한 톨만큼의 크기로 새하얀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자세히 살필 틈도 없이 휴지로 찍어 눌렀다. 소름이다. 형용할 수 없는 거부감에 소름이 끼친다. 너무 작은 탓에 외형을 잘 살피진 못했지만 다행히 바퀴벌레는 아닌 듯했다. 일단 색상부터 하얀색이니까.
작은 크기 탓에 '혹시나 바퀴벌레 유충은 하얀가?'라며 끔찍한 상상을 해봤지만 '아니겠지!'라는 생각으로 일축했다.
나는 벌레가 싫다. 어릴 때보타 클수록 더 징그럽게 생각된다. 어린 시절엔 잠자리채 하나 들고 메뚜기, 방아깨비, 잠자리, 나비, 매미 등등 잘도 잡고 다녔는데, 이제는 잠자리 빼고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없다. 메뚜기조차 꼽등이가 생각나서 꺼려지고, 가끔씩 방충망에 들러붙은 매미는 그 모습이 징그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우리 집에 벌레라니! 바퀴벌레나 개미는 한 마리 발견하는 순간 이미 수십 마리 이상이 퍼져있다고 하던데, 이 정체불명 벌레에 대해선 정보가 없으니 '이게 끝일 거야.'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 후 날파리조차 본 적이 없다. 벌레를 발견한 위치도 딱 신발장 중문 위에서 발견했으니, 우연히 집 문이 열렸을 때 한 마리가 딸아 들어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분께도 벌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당장에 그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없는 사건인 셈 쳤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아내분께서 카톡메시지를 하사하셨다. 집에서 왠 하얀 벌레가 나왔다는 전갈이다.
오 마이갓. 소름이다.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니.
컴퓨터방에서 프린터를 작동하려고 숙였는데 그 옆에서 발견했단다. 그때까지도 나는 모른 척했다.
"그렇구나. 잡았어?"라는 덤덤한 답장으로 다 해결된 사건인 양 가볍게 넘겼다. 혹시 모르잖아. 이번에도 우연히 들어온 한 마리였을지도. 봄이고 따뜻해지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프린터 주변에서 또 벌레를 봤다고. 혹시나 싶어 프린터를 들어내고 살펴보니, 그 뒤에 지독한 악취를 내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고 한다. 벌레는 아니고 효니가 슬라임을 갖고 놀다 떨어져 굳은 것 같단다. 벌레들이 그런 걸 먹겠냐 싶다마는, 냄새가 심하고 근처에서 벌레가 나온다고 하니 확실히 원인인 듯하다.
검색해 보니 '좀벌레'라고 하는 모양이다. 습한 곳에서 서식한다는데 최근 기온이 오르면서 보일러가 안 돌아간 탓에 환경이 맞춰졌나 보다.
그게 어쨌거나 효니가 가지고 놀다 흘린 슬라임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된다. 항상 잘 치우라고 해도 꼭 저 모양이다. 조심히 한다고 하면서는 항상 옷에 묻히고, 잘 정리했다고 해서 가보면 군데군데 슬라임 잔해물이 남아있다. 투명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내 생각에 부주의가 더 큰 요인 같다.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다.
애들이 어지르는 데는 정도가 없다. 아무리 어지럽혀도 한 장소에서 그러면 이해하겠는데, 말 그대로 '사방팔방'에 난리다. 잠깐 이거 하다가, 잠깐 저거 하다가, 그건 이따 다시 할 거니까 놔두고, 이건 이따 또 할 거니까 놔둔다. 계획은 그러는데 결코 다시 하는 일이 없다. 옆에서 제지하지 않는 이상 아포칼립스의 축소판을 체험하게 된다.
그나마 혀기는 J의 성향을 타고났다. 웬만하면 가지고 논 건 혼자 정리하고, 장난감도 한 줄로 세워 정리하는 식의 놀이를 한다.
문제는 효니다. 세상 온갖 것에 호기심이 많은 녀석은 짱구마냥 난장을 피우고 다닌다.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건 아닌데 항상 지나간 자리가 지저분하다.
그 때문에 깔끔쟁이 J인 아내분께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덩달아 규칙쟁이 J인 나도 깔끔 병이 도졌다. 아내분이 신경 쓰기 전에 내 신경부터 거슬린다.
시간이 한참 지나 발견한 것들은 내가 직접 치우기도 하지만, 어지간하면 어지른 사람이 직접 치우도록 시킨다. 그게 규칙이다. 치우는 사람 = 어지르는 사람.
규칙이 잘 이루어지진 않는다. 효니도 뭐 해코지 하려는 마음으로 어지르겠는가. 애들이라는 게 눈앞에 놀거리에 정신 팔려 뒤를 못 보는 거지. 그걸 보조해 주기 위해 부모가 존재하는 것 같다. 뒤치닥 거리하는 입장에서 속이 터지지만 그런 역할이다. 신이 자신을 대신할 존재로 엄마를 만들었다고 하질 않는가. 물론 아빠도 같이 해야지. 아빠는 엄마의 영원한 종이니까...(눈물)
그런걸로 화를 내는 건 부모 손해인 듯하다. 어차피 한 번 말해봤자 않듣는다. 장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뇌 속에 인식시켜 줘야 천천히 행동이 바뀌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부모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벌레는 안 생기게 하자.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