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에게 온갖 신경을 쏟으며 항상 옆에 붙어줘있어 하는 피곤한 성격의 나는 방치형 부모가 부럽다.
놀이터나 키즈카페를 가보면 부모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애들이 있다. 눈으로 애들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 구석에 부모가 있다. 별로 쳐다보지도 않고 생판 남처럼 무심하다. 아이들을 믿는 건지, 귀찮아서 신경을 끈 건지 모르겠지만 애들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맘대로 왔다 갔다 하며 세상 편한 모양이다.
계획과 약속의 J인 나는 비글 같은 애 둘을 챙기다 보면 금세 정신이 아득해진다.
좀 쉬고 싶은데, 애들이 곁에서 멀어지는 순간 물가에 애를 내놓은 것처럼 불안감이 차오른다. 애들 사고라는 어디 예고하고서 시간 딱 맞춰 일어나는 일인가. 악의가 없어도 한순간에 터지는 게 사고다. 이 험한 세상에 애들을 풀어놓기엔 내 호들갑이 허락지 않는다. 힘들어도 마음 편한 게 최고지 뭐.
지난 주말 의정부 과학도서관 주변 둘레길을 돌았다. 도서관 안에서 창밖으로 봤을 땐 건물 한 바퀴만 빙 도는 길인 줄 알았는데 길이 점점 산으로 올라가더라. 살짝만 턱을 넘어가는 줄만 알았는데 경사는 내려올 줄 모르고 도서관은 점점 멀어졌다. 건물 구경하러 나섰다가 팔자에도 없던 등산이 시작됐다.
다행히 나는 산길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밟을 수 없는 울퉁불퉁한 길을 능숙하게 오르는데 묘한 재미가 있다. 회색 건물은 사라지고 빼곡한 나무풍경에 찾아오는 평온함.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거리감이 느껴져 시끄러움에도 고요하게 느껴진다.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별다른 고민 할 필요도 없이, 누군가 앞서 만든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그 순간이 좋다.
자. 이건 내 감상이고. 가족들도 나랑 같은 걸 느낄까?
아내분께서는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리액션이다. 분명 산을 좋아할 리가 없는데 내가 느끼는 감상에 고개를 끄덕여준다.(그냥 말하니까 듣는 척하는 건가?)
효니, 혀기는 뭔지 몰라도 신나 보인다. 제법 불평 없이 잘 걷는다. 낮은 동산이긴 하나 계속된 오르막길에 돌계단들을 오르면서도 열심히다. 오히려 아내분이 힘들다고 뒤쳐진다.(나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우리 집 바로 앞에는 도봉산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몇 번 혼자 올라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는데 습관성 불안감 때문에 여태껏 이룬 적이 없었다.
'애들이 잘 갈 수 있을까? 중간에 힘들다고 하면 어떡하지? 업고 내려와야 하나? 다음날 다리가 아파서 울고불고 난리 치면 어쩌지?'
이런 걱정 때문에 조금이라도 난이도 있는 행선지는 늘 계획에서 빠졌었다.
헌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애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성장해 있었다. 폭풍성장이란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다. 가기 싫다고 찡찡댈 법도 한데 발걸음이 당차다. 물론 고강도로 힘들게 오른 건 아니지만, 지레짐작하는 내 편견을 우습게 넘어섰다.(반대로 금방 힘들어하는 아내분 역이 다른 의미로 내 편견을 우습게 넘어섰다.)
부모의 걱정이 아이의 한계를 설정한다. 그럼에도 무리시킬 수 없는 게 부모마음이다.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아니까. 그래서 아이를 더 품 안에 가두고 키우게 된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안돼.'라는 말 한마디로 아이들의 가능성을 가둬두고 있는 건 아닐까?
너무 걱정 많은 부모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십상이다.
다음에는 하루 날 잡고 아차산을 오르기로 약속했다. 충분히 오를만한 높은 산. 힘들면 쉬고, 또 쉬고, 또 쉬면서 가면 후유증도 없이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이전까지는 산 정상에서 보는 풍경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성취감과 정복감. 그런 산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그런데 이젠 함께 정상에 섰을 때 내가 더 많은 걸 느낄 것 같다. 어떤 느낌일지 백날 예상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직접 겪어봐야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