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효니 학교에서 공지사항이 전달됐다. 내용은 간략하게 요약되어, 최근 교내에서 외부인으로 인한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했다는 내용.
방과 후 외부인이 운동장에 남아있던 아이를 유인해 인근 차량으로 데려가려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이다.
사건에 대해 정확한 조사 전에, 해당 학생이 불안감을 느껴 '왠지 납치당할 것 같았다'라는 진술을 빌어 급히 공지된 내용으로 대략적이다. 실제 납치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불분명하지만 물증 없는 심증은 명백하다. 부모입장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안이니까.
용의자가 잡혔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불안하기에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까? 별 탈만 없다면 그냥 신경 끄고 모르고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효니, 혀기는 어린이집에서부터 안전교육을 통해 "안 돼요! 싫어요! 도와주세요!" 하는 내용을 세뇌 수준으로 교육받았다. 나도 틈나면 해당 구호를 외치며 항상 상기시켜 줬다.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 지진이 나면 책상 밑에 숨고, 불이 나면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어서 이동하는 것처럼 기본 중의 기본인 상식을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라는 작은 의심을 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가까운 데서 일이 발생했다. 오소소 한 소름이 등줄기를 훑었다.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오늘의 사망n / 부상n]이라는 전광판을 보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교통사고가 발생하는데 나랑은 전혀 관계가 없게 느껴진다. 자친 사고가 날 뻔하거나, 도로 중간에 사고로 멈춘 차를 볼 때가 돼서야 괜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남 일이 아니다. 아직 내게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공포감에 저녁식사자리의 대화주제는 해당 사건이 됐다. 애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려줬다. 성격 급한 혀기는 설명 도중에 "안 돼요! 싫어요! 도와주세요!" 하면서 소리를 높인다. 이 겁쟁이 녀석이 실전에서도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잊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마음이다.
허나 안심을 해도 될런지 모르겠다. 아줌마들 입소문을 타고 조금 더 구체화된 내용에서, 학생은 운동장에서 용의자를 따라 교문 밖으로 나섰다고 한다. 부모님이 불러서 데려다준다고 했다던가? 대충 그런 식인 모양이다.
그러다가 어떤 차에 타라고 했다나? 차로 이동한다고 했다나? 그즈음에서 불안감을 느낀 아이가 안 간다고 버티다가, 운동장에 남아있던 몇 명의 아이들의 시선에 그 모습이 들어오고, 괜히 제발 저린 용의자가 아이를 두고 그냥 갔다고 한다. 잡혔는지 어쨌는지에 대한 결말은 입소문 속에서도 완성되지 못한 듯하다.
내가 집중하는 포인트는 일단 학생이 따라나섰다는 부분이다. 사탕을 줘도 따라가지 말아야 하고, 엄마 아빠 지인이라 해도 따라가지 말아야 하는 건 그 학생도 교육받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처음에는 따라갔다. 용의자가 좀 더 독하게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강제로 끌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애들에게는 아는 사람조차도 따라가면 안 된다고 일러줬다. 평소 자주 만나는 친구 엄마여도 따라가면 안 된다고. "이모랑은 친하니까 따라가도 돼."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가. 허용범위를 잡아줄수록 보안은 취약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가족끼리 자주 보는 이모 삼촌이어도, 엄마 아빠가 없을 땐 꼭 전화로 같이 가도 되냐고 확인받고 가라고 알려줬다.(정말 깐깐하려면 그마저도 보내면 안 되겠지만)
미아 방지를 위해 경찰서에 아이지문등록하는 게 있는데, 오랜만에 생각나서 아이 정보도 업데이트했다. 사진도 최신으로 갱신하고 키/몸무게도 바꿔주고. 마냥 아이들에게만 조심하랄 게 아니라 미리 대비도 잘해둬야지.(써먹을 일이 없는 게 최고지만.)
며칠이 지나, 혀기랑 둘이서 집 근처 산책로에 갔다. 중랑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거나 걷고 뛰는 사람들이 넘친다.
혀기는 몇 걸음 앞서서 혼자 걷는다. 걷는 자세가 아주 귀품 넘치고 조심스러운 규수다. 평소에는 대감마냥 뒷짐을 쥐고 걷더니 오늘은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아 잡고 걷는다. '진짜 미스터리 한 혀기구만.' 하며 뒤따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할머님 두 분이 걸어오신다.
"어이구 귀엽게 생겼네."
지나가며 던지신 칭찬에 혀기가 모른 척한다. 아니, 모른 척이 아니라 오히려 길 옆쪽으로 피해서 간다. 평소라면 어른들이 쳐다보지 않아도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다니던 녀석이 이렇게 새침할 수가 없다.
괜히 뒤따르던 내가 "고맙습니다."하고 머쓱한 인사를 드린다.
나는 예의를 굉장히 중시한다. 가게에서 나올 때나 누군가 칭찬, 도움을 줬을 때 꼭 감사를 표하라고 가르친다. 요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혀기야. 할머니가 귀엽다고 하셨는데 고맙다고 해야지."
건조한 내 말에 혀기가 비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빠. 나 지금 납치당할 뻔했어."
어이없는 소리 하고 있네. 진짜 뜬금없고 계신다. 말 한마디에 벌써 몸값협상까지 꿈꾸는 모양이다.
또다시 맞은편에서 할머님 몇 분이 걸어오시다 말을 거신다.
"어머나 귀여워라. 얘 너 왜 그렇게 손을 이쁘게 모으고 걷니? 남자애가."
또다시 혀기는 외면하고 지나친다. 할머님들이 되돌아가면서 혀기 이야기를 하시는 게 들리는 데 혀기는 여전히 먼 곳만 응시한다.
"아빠. 봤지? 나 또 납치당할 뻔했잖아."
세상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아주 대견하고 장하구나. 아드님.
효니라면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더 신경 쓸 거란 생각을 했다. 헌데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는 혀기가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하긴, 신호등도 늘 손들고 가시는 분이시니까 당연한가? 규칙은 잘 지키면서 왜 집에서 뛰지 말아야 하는 건 잊으시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