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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Aug 25. 2023

냉장고가 고장났는데, 아직도 고장나있는 중

"냉장고에 숫자가 계속 깜빡거리는데."


일하던 중 받은 소식에 아무 생각도 별 생각고 안 들었다.  그냥 '왜 그러지?'하고 호기심이 결여된 물음으로 답할 뿐.

보통 냉장고는 그 자체보다 안에 내용물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냉장고 자체의 이상신호는 뜬금없기만 하다.


"인터넷에 쳐보니까 내부온도가 계속 상승하면 이렇게 된다는데."


그제야 인터넷을 쳐본다. 음. 정말이네. 문이 잘 안 닫혔거나 온도센서가 고장 나면 뜨는 알림이란다. 문이 안 닫힌 건 아닐 테고... 센서가 고장인가?


"그거 온도 센서가 고장 나면 그렇데. 다른 건 뭐 없어?"

"응. 계속 깜빡여."

"안에 온도는 어때?"

"괜찮을 걸?"

"확인해 봤어?"

"열어보면 괜찮은 거 같은데."

"안에 손을 넣어서 뒤에 스테인리스 판 만져봐. 그거 차가워?"

"잠깐 있어봐.... 음. 차갑지는 않은데."


갑자기 멘붕이 온다. 현실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일하는 중이라 직접 만져볼 수도 없는데 기능적 문제가 발생했다니 초조해진다.

이것저것 검색해 봐도 시원스러운 대답은 없다. 제조사 사이트에 질답게시판에도 속 시원한 대답은 없다. 디테일은 쏙 빼고 틀에 박힌 형식적 내용뿐.


일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간다. 그래봤자 이미 몇 시간 지난 후. 여전히 숫자는 반짝이고 있고 냉장고 안은 미지근을 넘어 포근한 수준이다.

다행히 냉동실은 작동 중이다.


냉장고를 앞으로 빼서 봐야 뭐가 좀 보일 것 같다. 내용물을 빼서 무게를 줄여봤지만 여전히 꿈쩍 않는다. 이상하다. 이렇게 무거운 제품은 분명 바퀴가 달려있을 건데. 이렇게까지 안 움직인다고? 모르면 일단 검색이다.

다행히 곧바로 답이 나온다. 냉장고 아래에는 수평을 맞추기 위한 다리가 있는데 그걸 올려줘야 한단다. 차분하게 따라 해 보니 힘겹게 밀려 나온다. 예쓰!

일단 당겨는 봤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버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뭘 하겠다는 의미로 당긴 게 아니다. 뭐라도 해야 하니까 당겨본 거지.


원래 기계가 말을 안들을 대 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다.

1) 때리기. 2) 재부팅.

냉장고를 때려볼까 생각했지만 이 크고 단단한걸 치면 내가 더 고장 날 것 같다. 신사적으로 코드만 뺐다 꽂는다.

오오! 팬 돌아가는 소리가 다르다! 시원하지도 않은 주제에 발악하듯 '끼이이잉!' 시끄럽던 녀석이 젠틀한 중저음으로 웅웅- 하고 돌아간다.

휴우- 맘 편이 잘 수 있겠다~




다음날이다. 출근길부터 골치가 아프다. 점잔은 척하던 냉장고가 새벽 내 쉰소리로 끼이잉- 거렸다. 결국 또 온도는 올라가고 내용물은 여름을 만끽하고 있다. 해결된 줄 알았건 만... 야메의 손길로 다스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출근해서 오전 중 후다닥 업무를 몰아하고 점심쯤 서비스 센터에 연락해 본다. 아, 센터도 점심시간이란다. 다시 조금 후 전화를 건다.


"어휴- 정말 불편하셨을 텐데요, 고객님. 그럼 서비스 기사님 방문 예약을 먼저 잡아드리겠습니다. 지금 예약 가능한 날짜가... 31일 날 괜찮으실까요, 고객님?"


아니, 전혀 안 괜찮다. 오늘은 15일. 대략 보름을 기다리라고? TV야 안 보면 되고, 세탁기야 손빨래라도 하면 된다. 근데 냉장고는? 단순히 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물을 다 버리게 생겼다고!!!!!


그렇게 얌전히 31일로 예약을 마쳤다. (...)


냉장고임을 어필하고 이런저런 사정을 말했지만 이미 예약이 차있는 상태라서 그때만 가능하다는 답만 돌아온다. 누군가는 소리치고 깽판 치고 뒤엎어서 항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내 주변에 있음) 나는 젠틀하니까. 내가 소리친다고 해서 상담직원이 몰래 빼돌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보니 서로 기분 좋게(?) 마무리한다.

무언보다 긴급건으로 메모를 남기면, 서비스기사님의 일이 빨리 끝나거나 예약이 취소돼서 중간 시간이 생기면 예약날짜보다 빨리 방문가능하다는 말에 타협했다.

이렇게 고비를 넘긴다.





이 앞에서 이야기가 끝났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진행 중이다.

지금은 25일. 문제가 발생한 지 10일이 지났고, 예약한 날짜는 6일이 남았다. 긴급건 신청하면 빨리 온댔으면서... 분명 우선조치 해준댔으면서...!!


계속 손가락만 빨며 기다린 건 아니다. 서비스신청 이틀 후부터 매일 센터에 전화하며 추가 메시지를 전달 중이다.

그나마 냉장고가 작동은 되고 있다. 하지만 냉장고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 중이라고 하긴 어렵다. 작동은 되는데 전혀 시원하지 않다. 냉장고 문이 닫혀있는 걸 감안했을 때, 내부다 더워지지 않고 미지근함을 유지한단 사실만으로 멘털을 다스리고 있다.(전혀 다행인 상황은 아니다!)


국내 대기업 제품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압도적인 품질? 누구도 따라히지 못할 유니크한 기술력?

바로 A/S다!!! 많은 센터! 빠른 수리! 친절한 서비스!


물론 체계라는 게 있으니까 떼쓴다고 될 일이 아닌 줄은 안다. 서비스기사님이 분신술을 쓰지 않는 이상 물리적으로 오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최소한 전화는 해줄 수 있잖아? 서비스센터에 전화해서 기사님께 연락주 십사하고 메시지를 부탁드렸는데 1주일째 무소식이다.


전화로 언제 오냐고 욕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런저런 긴급상황이오니 힘드시겠지만 가능하시다면 한번 들려주시라~' 하고 대화를 하고 싶은 건데 그 한통화가 어렵다. 솔직히 나쁘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이건 기사님이 관심 없이 신경 안 쓴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초조한 고객의 입장에서 이런 불만은 허용범위라고 해주길 바란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진상고객이라고 하는 건 너무하니까. (물론 서비스센터에 통화는 7회 정도 했지만 모두 1분 내외로 연결을 마쳤다. 젠틀하게.(?))


방금도 센터에 전화 걸어 연락 주라는 메시지를 남긴 참이다. 남은 날보다 기다린 시간이 길어지고 나니 반쯤 포기하는 심정이다. 마음이 황폐해지고 피폐해졌다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기사님. 보고 싶어요... 근데 보면 화날 것 같아서 안 보고 싶어요... 근데 빨리 보고 싶어요... 일단 화나도 봅시다 우리 좀... 물론 제가 일방적으로 화나있을 테지만... 물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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