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가 Sep 12. 2023

아들아. 넌 대체 뭔 생각이니?

미스터리 한 내 미니미.

"아잇. 이게 모야!"

식사 들려온 불만스런 소리 습관적으로 인상을 쓴다. 거 참. 밥 먹을 땐 좀 얌전히 먹으라니까. 한소리 하려고 쳐다보니 아드님의 젓가락이 두 동강 나있다.  원래 젓가락은 두 짝이지만 아드님은 끝이 연결된 보조젓가락을 사용 중이시다. 며칠 전부터 설거지할 때 헐렁거리더만 기어코 부러다.


인상을 편다. 당연히 말썽 피웠을 거라 오해했던 건... 미안하지 않다. 방금 전까지도 "장난 그만하고 씹어!"소리를 6번은 했다. 그냥 빠르게 포크로 교체해 주고 식사를 이어간다. 그 후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장난 그만하고 씹으라고 했지!"를 7번 더 한다.


힘겨운 식사를 마치고 다이소에 갈까 생각해본다. 젓가락은 내일사도 되지만 생각난 김에 다녀올까 싶다.

"나갈래?"

"어디 가는데? "

"다이소."

"그래. 가지 뭐."

아아... 따님이 가신단다. 안 간다고 하면 핑계 삼아 그냥 내일 가려고 했는데 흔쾌히 동행하실 줄이야. 귀찮게 됐다.


"혀기는?"

"안가."

"뭘 '안가'야. 니 젓가락 사러 가는 건데. 가자."

"아휴."

아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이없어 정말.


밖에 나오니 집에서 보다 바람이 더 잘 느껴진다. 제법 밤산책 느낌이 난다. 공기가 시원하니 왠지 마음이 후련해진다. 구름 때문에 별은 안 보이지만 오히려 어둠에 편안함을 느낀다.

맘이 편해지니 뒤늦은 미안함이 떠오른다.


내가 너무 신경질 적인가?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는 건데. 말투가 너무 날카로웠나? 툭하면 혼내는 아빠 때문에 애들이 상처받진 않을까? 그러게 말을 좀 잘 듣지. 그러면 내가 신경질 낼 일도 없을 텐데. 하여간 꼭 말을 하면 들어먹질 않아서 이렇게 난리야. 맨날 똑같은 말을 해도 똑같이 안 듣고. 이러니 내가 화를 내지. 다 인과응보. 그러게 혼나기 싫으면 말이나 좀 잘 듣던가. 어휴 진짜 왜들 이러는 거야! 진짜 미스터리 녀석들.


분명 미안함으로 시작했는데 어째 분노로 덧칠해진다. 유턴하는 심경변화에 스스로 혼란스러우면서도 틀린 거 하나 없고 생각한다.  하여간 말을 하면 안 들어.


내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서 걸어가는 두 뒷모습은 깨발랄이다. 가게 앞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서로 먼저 간다고 경주를 했다가, 갑자기 태권도 품세를 하면서 간다. 혼란스러운 모습에 남인척하면서 다이소에 들어간다. 나는 제법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이니까...


주방코너는 3층이다.

"3층으로 가."

명령어를 입력하자 목줄 풀린 수색견처럼 계단을 뛰어간다. 역시 젊어서 계단을 잘 올라간다.


힘겹게(?) 뒤따라 올라 젓가락을 찾아보니 딱 하나 있다. 아니. 개수는 많은데 디자인이 하다나. 하얀 토끼가 그려져 있는 핑크색 젓가락.

'아... 그냥 내일 올걸'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일 끝나고 회사 근처 다이소에 갔으면 좀 더 있을 텐데.

따님꺼라면 괜찮지만 아드님꺼라서 좀... 컨펌을 받아야겠다.


"우혀기씨. 이리 오세요."

우다다다- 소리를 내며 온다.

"젓가락이 있긴 한데 이거 하나밖에 없어."

"좋아!"


응? 오케이라고? 맨 윗줄에 걸려있는 제품이라 잘 안 보이나 싶어서 다시 물어본다.


"이거 분홍색인여도 괜찮아?"

"응."

"이거 그림도 토끼인데?"

"귀엽네에!"

"어. 음. 그래. 어차피 이거 집에서 먹는 거니까. 그럼 이거 산다."


예상을 벗어난 긍정에 당황스럽다.

원래부터 혀기는 누나가 써오던 것들을 이어 써오긴 했다.  2년 빠른 따님이 먼저 보조 젓가락을 떼면서 사용했던 것들은 자연스럽게 아드님께 계승됐다.

아드님은 누나가 쓰던 것에 대해 불만이 없다. 젓가락은 연령에 따라 기능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치자. 디자인이야 어차피 집에서만 쓰는 거고. 옷도 누나가 입었던 것 중 너무 여성스럽지 않은 건 다 물려 입는다. 그것도 별 말 없다. 옷빨이 잘 받아 어울려서 더 소름이다.


어쨌건 자동차와 벌레밖에 모르는 아드님께서 여성스러운(보편적인 관점에서) 제품을 쓰는 건 누나가 썼던 거니까 자연스럽게 이어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거를 살 수 있는 기회에서 여성스러운(보편적인 관점에서) 디자인을 고른 거에서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TV 보다가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나중에 그림으로 그리려고 폰을 빌려 사진을 찍어놓는 녀석인데. 만날 그리그리다가 디자인 재능에 눈을 뜬 건가?

참으로 부모다운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간다.


내심 생각해 본다. 나는 애들이 편견 없는 트인 생각을 했으면 싶다. 학교/어린이집에서 외국인 친구가 있다면 다르다고 놀릴 게 아니라 특별한 친구가 생겼음을 이해하고 더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그 외에도 남들의 편견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생각에 집중할 수 있길 바랐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조건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개인의 생각이 보편적인 생각과 동일할 수도 있는 건데. 부모의 욕심으로 오히려 그 생각을 왜곡한 건 아닐까?


디자인만 보고 여아용이라고 생각하고(아마 제작자의 의도도 같을 거라 추측한다.) 혀기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편견. 그게 조금 부끄러워졌다. 남들과 같은 선택도 남들과 다른 선택도 타인의 대답과 비교하지 않고, 그냥 선택 그 자체를 올곧게 바라보고 응원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야겠단 생각이 든다.


"아빠도 분홍색 좋아해. 남자는 역시 핑크지!"

"남자는 파랑이지."

대체 어쩌란 거야... 거 장단맞추기 어렵네 증말.

매거진의 이전글 "내 성격이 이렇게 된 건 다 애들 탓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