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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Sep 14. 2023

앨범 속 흑역사.

기억에도 없는 오래전. 나 자신조차 모르던 순간의 흑역사가 앨범에 담겨있다. 

걸어 다니지도 못했던 흑역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저귀만 차고 있던 흑역사. 심지어 그것조차 벗어던진 흑역사. 앞니는 빠져놓고 좋다고 웃고 있는 흑역사. 패션은 돌고 돈다는데 제발 저때의 패션은 안 돌아왔으면 싶은 모습의 흑역사. 


서스펜스 영화에서 나올법한 집착광의 도촬 사진처럼 내가 모르는 과거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두꺼운 앨범 표지는 너덜너덜한데 내용물은 용케 본모습을 유지하며 간혹 집에 방문한 사람들의 놀림거리로 제공된다. 


예전엔 그랬다. 처음 친구집에 가면, 특히나 애인의 집에 첫 방문 할 때면 부모님(특히 엄마)은 어딘가에 봉인돼 있던 앨범 두어 권을 가져오셨다. 


"잠깐 그거라도 보고 있어. 아줌마가 과일 깎아줄게."


뭔 메뉴판 던져주듯 건넨 그 앨범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 줄 알고... 어쩌면 그게 부모의 마음인가 싶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이뻐라 한다 하지 않나.

'네까짓게 내 피조물과 어울릴 것 같아? 이 흑역사를 보고 떨어져 나가 버려라!'

이 순간을 위해 부끄러운 과거를 그리 모아두셨나 보다. 이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참된 진심이 아닐까?



그 진심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난 분명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 있는데 내 스마트폰 속에는 흑역사만 저장된다. 순전히 모델 탓이다. 


요즘엔 간편하게 SNS에 사진을 올리면 되지만, 아내분께서는 굳이 사진을 출력해 앨범을 만드신다. 그게 좀 매력 있다. 같은 사진인데 손가락 하나로 넘겨지는 것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 보는 것. 손가락 두 개로 확대하는 것과 코앞까지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 '추억'이기에 아날로그로 기록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언젠가 이 사진들도 내 아이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때가 오겠지? 샤인머스캣 한송이에 키위 깎아서 내주고. 

그 앞을 생각해 보면 '흑역사'라는 단어가 더 이상 부끄러운 단어가 아니다. 조금은 반짝이고 조금은 포근하게. 주말 창가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아침 햇살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이들은 잊어버릴 이 순간의 행복을 더 많이 남겨놔야겠다. 나중에 "엄마 아빠 진짜 내 부모 맞아?"라고 했을 때, "이거 봐라. 엄마 아빠가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네가 이러고 다녔어."라는 증거물로 제출할 수 있도록. 흩날리는 내 아이들의 기억을 기록한다.


그런데 이 사진은 진짜 웃기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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