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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Sep 19. 2023

우리 집 중증 태권도중독자

따님은 초등학교 입학즈음부터 태권도를 다녔다. 동네에 인기 있는 태권도장이 하나 있는데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다니면서 자기도 가고 싶다는 관심을 어필했다.

잘됐다 싶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는(점심만 먹고 바로 하교한다.) 초등학교 1학년의 남은 반나절을 메꾸면서, 폭주하는 E의 에너지를 잠재우기 위한 동적인 활동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도 그랬고 아내분도 그러셨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어린 시절 태권도, 미술학원, 피아노학원은 꼭 거쳐가야 하는 정규교육 수준 아니던가. 따님 쪽에서 먼저 딜을 제시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콜을 했다.


따님의 적응은 남달랐다. 좀 과하다고 할까? 태권도 중독자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차기, 지르기, 품세를 남발했다. 밖에서 남부끄러운 줄 모르는 건 그렇다 치고, 식사도중 음식을 씹으면서 태극 4장을 하는 건 납득해 줄 수준이 아니다.


나도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태권도 연습에 동참했다. 각 자세의 포인트를 잡아주고, 기억에서 삭제된 품세는 유튜브를 보며 함께 연습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드님까지 덩달아 태권도를 하는 진풍경에 아내분께서는 매일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느 날 따님이 '꼬마사범님'이 됐다고 자랑을 했다. 이 도장에선 잘하는 친구에게 완장을 채워서 다른 친구들을 돕는 제도가 있다. 일일반장 같은 시스템이다. 이게 파란 띠를 달았을 때의 일이다.

흰띠-노란띠-파란띠. 고작 세 번째 수준에서 뭘 얼마나 잘하겠나. 그저 동급 중에서는 열심히 하는 수준에서 동기부여를 위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음날도 꼬마사범님. 그다음에는 안 하고. 또 그다음 날 꼬마사범님.

분명 하루씩 돌아가면서 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자주 한다.

활동하는 모습은 못 봤지만 자주 완장을 차는 모습을 보니 툴툴거리면서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양이다.


가끔 피곤할 때나 한두 번 "가기 싫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즐기는 듯했다.(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은 항상 태권도를 하고 있다.)



그렇게 1년쯤 지나고 국기원에 가서 1품을 따왔다. 사실 누구나(?) 따오는 거지만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작은 결과값이라는 생각에 대견했다.

1년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길을 걷다 태권도를 한다. 사람들 눈치 보는 건 내 몫...


두 달쯤 후 따님은 경기도에서 여는 큰 대회에 나갔다. 어느 기업 후원대회가 아닌 경기도 전체에서 모여드는 대회로 8시간 넘게 진행된 꽤 큰 대회였다.


따님은 여기서 1-2학년 급 등급에 출전했다. 상대는 어딘가의 남자아이.

체구가 작은 편인 따님과는 기본적인 힘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변칙적인 스텝으로 훼이크를 섞어 치고 빠지며 싸웠지만 점수차이로 아쉽게 대결에서 패했다.


이후 각 학년급에 대한 시상이 발표되는 시간. 금메달은 어디 어딘가의 남학생이 받았다.

그다음은 은메달. 놀랍게도 따님이 받았다! 참가인원들에게 모두 주는 메달이 아니고, 수상자가 몇 명씩 중복되는 메달도 아니다. 그야말로 금은동 중에 은!

아직 어린 학생들의 성장/성별에 따른 신체능력 차이를 감안해, 승패가 아닌 겨루기 실력을 보고 얻어낸 진짜베기 메달이었다.

꼬마사범님이나 1품과는 달리, 어디 가서 든 당당하게 자랑할 만한 이력이다.




이런 따님께서 요즘 부쩍 태권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학교가 끝나고 태권도 차를 타기 전(셔틀버스가 학교에서 데려간다) 전화를 한다.


"나 좀 어지러운 것 같은데 오늘 태권도 안 가면 안 돼?"

"나 손가락이 아픈데 태권도 안 가면 안 돼?"

"나 머리도 어지럽고 손가락 아직도 아픈데 태권도 안 가면 안 돼?"


집에 오면 말짱한 몸이 왜 태권도에 갈 때만 아픈 건지... 한 번도 허락해 준 적 없는데 꾸역꾸역 전화한다.

다녀온 후에 어땠냐고 물어보면 재미있었다고 한다. 아픈 것도 괜찮아지고. 그래서 '이젠 잘 다니겠지'하고 방심하면 곧바로 다음날 다시 전화가 온다.


"따님. 어차피 태권도 가라고 하는 거 알지?"

"응."

"그런데 왜 맨날 전화하는 거야?"

"그냥."

"따님도 어차피 다녀오라고 할 거 알지?"

"응."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애들은 당연히 놀고 싶어 하니까 태권도 가는 게 귀찮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리 가기 싫어해도 부모가 약한 의지를 지탱해 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최근 점점 늘어가는 전화 통화에 '억지로 붙잡아 두는 게 맞나?' 하는 고민이 싹텄다.


'태권도를 그만두면 어딜 다녀야 할까?' 하는 고민 또한 새로운 고민의 씨앗이 된다.

태권도에 다니기 싫다는 건 그 시간에 쉬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는데, 그 빈자리를 다시 메꾸면 따님에겐 아무 소용없는 거 아닌가? 오히려 그동안 배웠던 것들을 버리게 되니 마이너스는 아닐까?

지금까지 배운 게 아까우니 계속 보내는 게 맞을까? 아니면 따님이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게 맞을까?

부모의 역할은 늘 고민하는 거다. 내 행동뿐 아닌 내 아이의 결과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나도 부모가 처음이라서..."라는 말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지는 모르겠지만 내 심정을 기똥차게 표현한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은 긴 시간이지만 그만두기엔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태권도, 피아노, 미술은 초등학교 저학년을 넘기면서 대부분 그만둔다. 아마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하지만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어쨌건 노력해 온 길이기에 따님이 조금 더 잘해줬으면 싶은 욕심. 순전히 부모의 욕심이다. 


어쩌면 따님의 열정에 옮아 내 마음도 태권도에 중독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마음으로 너는 몸으로 우리 조금만 더 노력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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