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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Jan 04. 2023

위기의 밤 산책.

나혼자만 셀프위기

늦은 밤, 11시 30분쯤. 번화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인적이 사라진다. 조금만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나는 차도 드문드문 줄어든다. 세상의 소음이 가라앉고 땅을 스치는 내 발소리만 츠읏- 츠읏- 올라온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그즈음의 시간에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더 이상 명절 때 부모님을 따라가지 않게 된 시절이기에 밤에 몰래 하는 산책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이 한순간 사라지고 나 혼자만 남은 듯 한 기분. 밤 산책 중에는 그 무엇도 신경 쓸게 없어서 스트레스를 씻어내고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내가 사는 동네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 다닐 일 없는 그 골목골목을 누비며 내 머릿속에 동네 지도를 새겨 넣는다. 큰 도로가를 지키는 깔끔한 건물들과 달리 그 뒤에 가려진 동네는 상대적으로 허름하고 음침하기도 하다.

이런 곳이 있구나. 이런 건물이 있구나. 오호- 이렇게 가면 지름길이 되네?

알아둔다고 해도 지나갈 일 없지만 혼자 하는 그 모험이 재미있었다.


남들은 그 늦은 시간 혼자 나가기 무섭지 않냐고들 하는데, 그런 불안은 느껴본 적 없다. 나 혼자만 로그인해 있는 이 세상에 무서울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 망상과 달리, 그 시간, 혹은 더 늦은 시간에도 사람은 있다. 내 속성이 남성이기 때문인지 상대방이 한 명이라면 무섭지 않게 지날 수 있었다. 여러 명이 골목을 막고 있다면 성별 따윈 의미 없이 당연히 공포를 느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행히 그런 위기는 없었다.


오히려 나에겐 위기가 아닐 것 같은 상황이 내겐 위기였다. 나는 양성차별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두 성별에 차이가 있다는 부분엔 적극 공감한다. 그래서 야심한 시간 어두운 밤길에 서로 모르는 남녀가 걷게 된다면 여성은 큰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는 걸 안다. 그 부분이 오히려 내게 불안과 공포였다.

저 앞에 걷는 여자가 분명 날 인식했을 텐데 그럼 불안감 느끼겠지? 나는 무해하고 아무런 마음이 없는데 갑자기 경찰을 신고해서 날 무고하게 몰아세우면 어쩌지? 나는 내 결백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지? 불안이 빚은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그래.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쫓고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울 거야.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걸어가며 저 여성분의 불안감을 줄여주자.'


최대한 자연스럽게 속도를 올린다. 괜히 오버해서 달리다가 긴장한 여성분이 흠칫 놀라지 않도록 조금 더 큰 보폭으로.

하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줄지 않는다. 오히려 제 3자가 내 크고 빠른 보폭을 보고 의심스러워할까 봐 새로운 걱정이 생긴다. 깊은 밤 한 여성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거리를 줄여가는 한 남성. 흠... 그래. 지독하게 의심스러운 비주얼이긴 하겠다.

멈추고 뒤로 돌아가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또 다른 의심이 될까 봐 걱정이다. 먼저 지나가길 기다려줬다가 출발하면, 저 앞에 시야에서 사라진 그 여성이 경찰과 잠복해서 뒤따라오는 나를 덮칠까 봐.


지금 생각해보면 심야 산책이 정말 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게 맞나 싶어 진다. MBTI 극 N의 망상이 어둠 속 이매망량처럼 휘몰아치는 그 밤. 그 밤에 몰래 산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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