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마저 소중해
배냇머리. 태어나서 한 번도 자르지 않은 첫머리털을 말한다.
아이가 태어날 때 '얜 도대체 뱃속에서 뭘 하다 나온 거지?' 싶을 정도로 특수한 모발량을 타고나지 않는다면, 보통은 듬성듬성 잡초 같은 배냇머리를 달고 나온다. 속설에 배냇머리를 빡빡 밀어주고 나면 머리가 더 풍성하게 수북이 자란다는 말이 있어, 초기부터 땡중마냥 삭발을 시키곤 한다.
첫째인 효니도 그런 위기가 있었다.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마냥 힘없이 매달려있는 머리카락 때문에 아내분께서 머리를 밀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쿡쿡 찌르곤 했다.
"됐어. 어차피 똑같아."
나는 배운 사람이다. 현재는 퇴역이지만 어쨌건 미용을 전공한 사람. 다리털을 밀고 나면 더 굵어진다는 낭설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모발은 모낭에서 자라나는데 머리카락을 밀어주는 것과 무슨 관계인 건지. 나뭇가지마냥 중간에 여러 갈래로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서 효니의 머리카락을 노린다.
배냇머리는 모발 끝이 바늘처럼 가늘어지기 모양이라 모발을 자르면 단면이 배냇머리 끝보다 굵다. 그래서 이후에 자란 머리는 더 굵고 풍성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사실상 풍성해지는 건 아니다. 어차피 0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아쉬운 모양새라도 1+1이 더 빨리 머리를 자라게 해주는 거 아닌가?
나름의 지식을 무기로 효니의 머리카락을 변호한다. 팩트로 밀어붙이니 더 이상의 반론은 없다.
안달 난 사람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까짓 것 한번 밀어버려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내 머리도 아니니까(?). 그런데 내가 싫다. 그냥 빡빡이가 된 모습을 보기가 싫다. 괜히 아깝기도 하고 뭔가 이상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에 삭발은 절대 불가다. 대머리라니.. 으으. (참고로 나는 해당사항 없다. 진짜로.)
그냥 개인적 취향이다. 특별히 긴 머리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효니 머리만큼은 평생 안 잘라도 좋겠다 싶었다.
미용실에서 처음 스텝으로 일하던 시절, 머리 긴 손님이 한 뼘 이상 커트를 하려고 하면 샴푸실에서 조용히 무슨 격정적인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건지, 커트 말고 그냥 다른 시술만 하고 가면 어떨지, 미세한 회유책을 펼치곤 했다. 그 머리를 기르려면 몇 달, 몇 년은 걸리는데, 그걸 잘라내는 게 아까웠다. 내 머리도 아닌데, 고객님의 머리카락이 숭덩 잘려나갈 때면 내 살이 베이는 것처럼 섬뜩한 소름이 등줄기를 훑었다.
모발에 대한 내 진심? 대충 변태적이지 않을 만큼의 그런 진지함이 내 안에 있었다.
그렇게 효니의 배냇머리는 몇 년을 걸쳐 꼬물꼬물 자라났다. 나는 효니의 머리가 바닥까지 닿아 TV에 나오는 상상까지도 해봤다. 하지만 그 망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앞머리.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효니의 앞머리가 눈썹 정도에 맞춰 모래사장에 그어진 물자국처럼 애매하게 잘려있었다.
어. 음... 어.... 음?
앞머리가 눈을 찌르길래 귀여울 것 같아서 잘라주었단다. 우리 아내분은 능력도 출중하시다. 미용을 배운 나도 못 건드린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잘라주시다니.
최대한 어색함을 감추며 괜찮다는 리액션을 해준다. 설명하기 부적합한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한두 달이 지나면 또다시 머리카락이 정리되었고, 나는 그 일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게 뭐 별일인가 하지만 그때의 내 심정은 참 그랬다.
그러다 결국, 뒷 배냇머리가 허리쯤 내려왔을 때 뾰족뾰족한 머리끝이 지저분해 보인다는 이유로 등 중간 정도 위치까지 잘렸다. 아아아. 이래서 옛 우리 조상님들이 머리카락을 안 자르셨나 보다. 이 울렁임에 가까운 떨림을 견딜 수 없어서였겠지.
그만큼의 길이여도 물론 충분히 긴 머리다. 아직 키도 작고 조그마한 아이니까 여전히 머리가 길어 보였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속은 혼돈으로 꽉 막혔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나, 아내분의 세뇌에 잠식당한 효니는 단발머리를 감행하게 된다. 억지로 잘린 건 아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내가 몇 번이고 효니한테 "단발로 자르고 싶어? 단발이 어떤 모양 머리인지 알아? 그거 하면 머리 다시 길고 싶어도 못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진짜 단발로 하고 싶어?"하고 물었지만 효니는 확고하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단발이 짧게 치는 것도 잘 알고 있더라. 으으으. 저 요망한 아내분 녀석! 효니를 꿰어내다니...!
효니가 목 정도로 머리카락을 치는 날, 나는 내 목이 쳐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뭘 어쩌겠는가. 효니가 하고 싶다는데. 자식 갖은 아빠의 마음, 딸 갖은 아빠의 마음인 거지 뭐.
다행히(?) 그 이후 머리를 차근히 길러 다시 긴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내분은 한 번씩 자를 것을 권하는 듯 하지만, 효니가 안 자른다고 한다. 흐흐흐. 그간 내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줄 알았더냐! 내가 다시 세뇌한 덕에 효니의 머리는 잘 지켜지고 있다. 다듬는 정도로 한 번씩 자르긴 하지만, 눈에 거슬리 만큼의 큰 변화는 없다. 눈감고 넘어갈 법 한 수준이다. 다행이다.
더이상 효니의 머리카락을 넘볼 생각 말아라! 아내분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