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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피아노와 함께 산다는 건

『처녀작-처음 쓴 녀자 작품집』 속  <에세이> 조미예

by 우지 Feb 07. 2025

기본 4박자 쉼표, 마디 전체를 쉬는

쉼표이기도 하다 : 온쉼표


경기도 화성시 방 3개의 25평 16층이 나의 신혼집이다.

방마다 신혼살림들이 채워져 있지만. 지금 작은방 1은 비어 있다. 그 방의 주인공인 그랜드피아노는 춘천에 있다. 나는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살았다. 오전에 합창단 반주를 하고 오후에는 방과 후 피아노 교실, 저녁에는 개인 지도를 하는 프리랜서였다. 열성적인 합창단 지휘자 선생님 덕분에 지역적으로 공연도 많이 다녔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또한 주기적으로 콩쿠르에 나가면서 매년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바쁜 일과를 지내듯 나의 그랜드피아노도 대회 준비하는 아이들 수업용으로, 나의 반주 연습용으로 틈틈이 조율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 이후로 우리의 찬란하고 흥겨웠던 시간이 조용해졌다.


운반은 춘천에서 조율을 담당해 주신 조율사님께 부탁을 드렸다. 장거리 운반팀과 함께 오신 조율사님의 마지막 조율 이후로 그랜드피아노는 7년 동안 조율을 받을 수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랜드피아노는 손가락으로 눌러야 하는 건반악기에서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타악기로 아이의 장난감이 되었다. 그마저도 3살 때 선물 받은 뽀로로 피아노에 외면당하기도 했다.


늦은 나이에 육아는 쉽지 않았지만, 서로 다른 환경의 타인과 사는 것은 몇 배로 더 힘들던 때였다. 철저히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나는 아무도 연주하지 않은 작은방 1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랜드피아노처럼 있지만 없는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조용히 피아노 방으로 가서 88개의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검은건반과 흰건반을 손으로 문질러 본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지만, 매끈한 건반의 촉감이 나를 위로해 준다.




나는 왜 피아노를 전공하게 되었을까?

집에서는 수다쟁이 첫째 딸이지만 밖에 나오면 투명 인간이 되고 싶을 만큼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였다. 지금은 다행인지 성향이 많이 변했다. 피아노학원은 그런 나의 성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었다. 닭장처럼 업라이트 피아노가 방마다 있는 그 작은 공간에 나는 오로지 혼자였다. 그곳에서 나는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편안함을 느끼는 만큼 연습을 많이 하는 학생이었고 그만큼 실력은 피아노를 전공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나는 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피아노 울림을 좋아한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건반 하나를 손끝으로 누를 때와 손가락의 평평한 부분으로 누를 때 소리가 다르고, 손목의 힘으로 누를 때와 어깨의 힘으로 누를 때가 다르다. 내가 무엇을 상상하는가에 따라서 음이 달라지기도 한다. 화가 나서 누를 때와 즐거울 때 연주하는 음도 다르다. 내가 화가 날 때는 같이 화를 내어주고, 내가 기쁠 때는 통통거리면서 같이 즐거워해 준다. 함께 기뻐해 주고 슬퍼해 주는 피아노가 나는 참 좋다.




그랜드피아노 185는 나의 두 번째 피아노이다.

첫 번째는 9살에 만난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이다. 9살에 만나 30살까지 나와 동고동락을 같이 하였다. 수입이 늘어나면서 전공자의 로망인 그랜드피아노의 구입을 결정하고 선배 언니와 공장을 다니면서 나와 맞는 피아노를 찾아다녔다. (나는 금전적으로 부담 없는 국내 브랜드를 찾고 있었다. 지금의 그랜드피아노는 중국에서 만들어져 온다. 1980년대까지 생산된 피아노가 국내 생산이기도 했고, 악기의 음질이 잘 길들여진 중고 피아노가 들어오면 연락을 받고 오리지널 상태 그대로 볼 수 있어서 공장으로 돌아다녔다. 구매를 결정하면 그분이 조율과 외관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보내주신다) 운명 같은 남편과의 만남처럼 지금의 그랜드피아노를 만났다. 소리를 하나하나 눌러보면서 울림을 느끼고 외관 상태를 꼼꼼히 체크 후에 구매를 결정했다. 내가 선택한 아이, 나의 노력으로 구매한 아이, 그만큼 책임감을 가지고 관리를 하였고 그만큼 애착이 많이 가는 아이다. 그 아이가 나와 함께 화성으로 왔다. 우주 속 화성에 온 것처럼 조용하고 아무도 없는 이곳으로 한 남자를 따라서 온 것이다.


신혼집 집들이 마다 사람들의 반응들은 먼저 작은 방 1의 주인인 그랜드피아노이다. 방 하나를 차지하는 그랜드피아노의 존재를 놀라워하는 사람들, 방 하나를 못 쓰게 됐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불안해하는 나의 마음처럼 집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랜드피아노는 존재의 불편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의 신혼집에서 그랜드피아노는 조용히 그다음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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