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작-처음 쓴 녀자 작품집』 속 <소설> 최은아
난희는 엄마에게 물었다. 정숙은 한 번도 답한 적이 없었다. 정숙은 딱히 불행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난희는 정숙이 더 행복했으면 하고 바랐다. 난희는 행복한 집은 아빠가 7시면 땡하고 초인종을 누르고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저녁밥을 차린다고 생각했다. 난희의 아빠는 집을 나갔다. 그런데도 난희는 아빠와 함께한 저녁 식탁을 상상했다. 그건 아마 텔레비전 때문일 거다. 밥상을 차리기 전에 틀어놓은 일일 드라마 속 아내는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은 매일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왜, 결혼했냐고!”
다시 물어봐도 정숙은 ‘왜 결혼했을까?’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듯, 저녁밥을 차렸다. 손질된 고등어를 잽싸게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생선의 살들이 익어가는 사이 정숙은 마른 빨래를 머리 높이까지 걷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 차릴 동안 이거나 개고 있어!”
정숙은 서둘러 가스레인지 앞으로 달려가 타지 않게 생선을 뒤집고 감자를 조린다. 달큼한 간장조림 냄새가 부엌을 채우자, 난희는 배가 고파왔다. 그사이 돌솥에서는 하얀 연기가 치지직 소리를 내면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고소한 밥 냄새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밥 냄새는 피 나는 살갗에 일회용 밴드를 붙인 것처럼 상처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아빠는?”
난희가 묻자, 정숙은 놀란 기색도 없이 물었다.
“아빠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어떤 아줌마랑 가는 거 봤어.”
“밥이나 먹어”
“엄마는 화도 안 나?”
정숙은 노릇하게 구워낸 생선 살을 흰 쌀밥 위에 올려놓고 입에 가득 쑤셔 넣었다.
“일단 먹고, 이야기하자”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도 정숙은 밥 한 공기를 싹싹 다 비웠다. 난희도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까발리고도 속 편하게 밥을 먹었다. 이건 다 정숙 때문이다. 정숙은 언제나 세상의 근심을 싹 다 사라지게 만드는 음식을 만들었다. 난희는 배가 두둑해져 오니 잠이 쏟아졌다.
‘아아 몰라, 어떤 여자랑 팔짱 끼고 아빠가 사라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희는 아빠가 있든 없든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깨끗하게 세탁된 옷을 입고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정숙이 남편 때문에 울고불고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난희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싶어졌다.
“어딜 가? 여자는 어때?”
“뭐가 어때?”
“이쁘든?”
“쭈글쭈글하고 되게 없어 보였어.”
“잘 주나 보네. 그럼, 됐어”
정숙은 밥상을 치우고 슬그머니 소파에 드러누워 연속극을 보았다.
“그렇게라도 풀어야지, 어쩌겠니.”
“엄마! 그래도 아빠가 딴 여자랑 그러는 거 화도 안 나? 이럴 거면, 그냥 이혼해!”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 아들과 엄마 같다. 서로 보듬기는 했으나 애정을 나누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이는 아닌, 서로의 삶이 궁금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
‘이 찜찜한 거리감은 뭘까?’ 난희는 아빠가 딴 여자와 사라진 조용한 집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난희는 엄마와 아빠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천박하게 싸우길 바랐으나 그들은 속 시원하게 욕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서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정숙은 남편이 슬그머니 집에 들어오면 “밥은?”이라고 물었고 낮이든 밤이든 밥상부터 차렸다. 난희의 속은 조용히 썩어들어갔다. ‘뭘까? 어떻게 바람피우는 걸 용납할 수 있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평화롭다. 훌륭한 부모다. 이들이 부부로 사는 건 아마, ‘나 때문이겠지?’
난희는 정숙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아빠를 미워해 보려고 했다.
“씨발 새끼”
난희는 엄마 대신 아빠 없는 허공에 욕하고 잠이 들었다. 1995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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