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남 Mar 28. 2017

[소설] 내려놓음 101 신호등 앞에서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1 신호등 앞에서Ⅰ




 그간의 치료로 어느 정도의 개선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주일 전 MRI를 촬영했다. 찍고 그날 바로 판독해주면 좋을 텐데 7일이나 기다려야 했다. 환자가 나 말고도 많아 한참 밀려 있고, 의사도 사람이라 쉴 시간이 필요하고, 가정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병원이 나에게 치료를 더 많이 주었는지 기다림을 더 많이 주었는지 당최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의료인이 아니었다면 ‘기다림 자체가 치료 중에 하나가 아니었나?’ 망상 했을지도 모르리라. 입원했었을 때 옆 침대에 계시던 신사 아저씨가 미국에서 치료받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병문안 오신 그의 부모님 말씀에 의하면 아저씨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중에 마찬가지로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온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그대로 미국에 눌러앉아 취직한 엘리트였다. 꽤 큰 무역회사의 직원이었던 아저씨는 급여는 만족스러웠지만 1년에 비행기를 50번 넘게 탈 정도로 출장이 잦아 귀여운 딸들을 자주 못 본다고 많이 아쉬워했다. 혼자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여러 일들을 인수인계하고 때로는 영어로 전화통화하며 계약들을 진행시키던 아저씨는, 시차를 가늠해서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관심은 항상 두 딸에게 가 있었다. 특히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둘째 딸에 대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래서 한 번은 여쭈어 본 적이 있었다.


맨날 혼자 계시고...
그냥 가족 있는 미국이 더 안 낫나요?
직장도 좋으시니까 의료보험도 꽤 괜찮을 텐데,
아저씨는 우리나라 의료 보험이 안 되어서 좀 비싸기도 할 것 같구.
어차피 한국에서 든 치료비는 회사에서 다 주니까 치료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겸사겸사 형님도 보고, 자주 못 뵙는 어머니, 아버지도 이 기회에 한 번 보고,
이래저래 좋죠, 머.
외국에서 치료 받아도 회사에서 다 의료비 주는 걸 보면 의료보험 꽤 괜찮은 게 들어져있었나 보죠, 회사에서?
흠.. 별로에요.
비싼 의료보험비는 다달이 다 떼어가면서, 막상 아파서 치료받으러 가면 거의 공짜 손님 대하듯이 하니까.
의사 한 번 보려면 2주 전에 예약해야 하고, 봐도 해주는 건 별로 없고.
진짜 별로네요.
그래서 아픈 데도 한국까지 와서 치료받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닌데 상황이 좀 복잡해요.
일본 출장을 딱 끝내고 미국에 가려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영 이상한 게 이것저것 불안해가지고,
하여튼 좀 그래서 일본 온 김에 형님한테 조언 좀 받아야겠다 싶어서 급한 데로 가장 빨리 있는 한국 가는 비행기 탔는데 공항에서 너무 어지러워서 완전 주저앉았어요.
그래가지고 내가...


 다행히 아저씨가 탄 비행기는 대구 공항이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짐 가방을 챙겨 C대병원까지 찾아온 에피소드들이 이어졌다. 응급실에서 저혈당 쇼크 비슷하게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당뇨인가 보네요. 미국에서 당뇨 관리를 대충한 건가?
그게 또 복잡해요.
우선 미국에서 당뇨 비슷한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형님이랑 여기 의사들 말로는 당뇨는 맞는데, 엄밀한 의미의 당뇨는 아니래요.
약물 부작용이라나 머라나.
예전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저에게 대상 포진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먹는 약이 있었는데 그게 스테로이드라네요.
그런데 그걸 너무 과용해버렸고 그래서 부작용으로 혈당 조절에 좀 장애가 생긴 것 같다고...
그렇구나.
하긴 이렇게 엄청 마르신 편인데 당뇨라니 이상하기는 했어요.
여기 의사들이 말하기로는, 지금껏 처방 받은 약이 요즘은 잘 안 쓰는 옛날 약이라는데 아직도 쓰고 있냐고 황당해하고, 그 덕에 자료 찾는다고 늘어지고, 검사는 또 몇 개를 더 하는지...
난리네요.
그러니까.
많이 답답해요.
처음부터 여기서 치료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굳이 아저씨를 떠올리지 않아도, 대학 시절 강의 시간에 배운 각 나라의 의료제도를 보면 정말이지 우리나라는 최상급에 속했다. 아마 다른 나라였으면 일주일이 아니라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예 MRI 촬영 자체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섭섭하고 속상하다. 한 시라도 결과를 더 빨리 알고 싶다. 아프면 애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기 하루 전, 다가올 일들에 대한 불안을 덜어보고자 회진 온 교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정도 치료 경과면 어떤 편인가요?
gross motor나 fine motor 모두 멀쩡하고 이렇다 할 불편함도 별로 없는 게, 이 정도면 사례보고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수술 후 경과는 나쁘지 않아요.
럭저럭 괜찮아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일부터 있는 방사선 치료에요.
방사선이 얼마나 잘 듣냐가 가장 큰 관건이니까 거기에 가장 유념해야 돼요.


 ‘정말 좋다. 기대 이상이다.’ 같은 말로 나의 불안감을 희석시켜주기를 바라고 한 질문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시일을 지켜봐야 한다. 그럭저럭 괜찮다.’ 의 표현에는 평균치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평균값 자체가 나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현실에서는 별로 희망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도리어 남은 치료에 더 많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큰 압박으로 다가와 감기 걸리기와 같이 나의 부주의로 인해 방사선 치료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그게 얼마나 부담이었는지 틈만 나면 체온을 측정하고 조금만 높게 나와도 심란해했더랬다. 특히 중이염 오해 사건 때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감기에 걸려 방사선 치료가 연기되는 바람에 암세포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악몽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꾸었을까. 그래도 그 덕분에 단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무사히 치료를 끝낼 수 있지 않았나, 종종 생각한다.


사례보고 (case report)

어떤 특정 환자의 치료나 간호에 관한 식견을 학회, 잡지 등에 발표하는 것. 일반적으로 증례보고의 대상이 되는 사례는 드문 질환의 경우, 새로운 검사법이나 치료법을 사용한 경우 등이 많다. 사례보고에서는 사례를 소개하고 시행한 치료ㆍ검사나 간호를 요약해 고찰을 가한 뒤 보고된다.




 방사선 치료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있었던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과의 면담에서는, 치료 시작 전날 하셨던 신경외과 교수님의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려 한 번 여쭈어 보았었다.


방사선 치료 경과가 무척 중요하다고 신경외과 교수님이 그러셨는데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MRI 찍어서 확인해보았더니 생각만큼 경과가 좋지 않다면 어떻게 되나요?
2차 치료가 있을 수 있나요?
아뇨. 추가 치료는 없어요.
방사선 치료가 종양 세포 제거에 있어서 정말 탁월한 장점이 있는데, 정상조직도 같이 제거해버리는 단점 때문에 많이 쓸 수가 없어요. 정말 조심히 써야 해요.
그리고 지금 병소가 뇌라서 한 번 잘못되면 돌이키기도 힘들어서 추가적인 처치는 없다고 보시면 돼요.
아, 걱정되네요.
게다가 지금 치료도 가이드라인의 상한선 부근에서 진행되고 있거든요.
생각보다 더 잘 버티셔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다 썼어요. 더 받는 건 무리에 가까워요.
그리고 결과 괜찮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기다려보세요.
꼭 그렇게 되겠죠?
네, 그리고 MRI 찍고 나서 교수님이랑 상담하고 나면 저에게도 한 번 방문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수술 경과는 나쁘지 않다. 방사선 치료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용하느냐가 중요 관건이다.’ 라고 하는 신경외과 교수.

‘가이드라인의 상한성까지 최대치로 치료했다. 더 이상의 방사선 치료는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

전체 치료의 70% 이상이 이미 진행된 현실.



 모든 것을 종합해보았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딱 하나이다. 방사선 치료 경과를 담은 MRI 영상의 판독은 종양 치료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것. 앞으로 남은 6차례의 화학요법은 방사선에 의해 와해된 종양 조직의 섬멸을 위한 게릴라전 수준일 터, 만약 방사선에도 종양이 끄떡없다면 과연 무엇을 장담할 수 있을까?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전에 승현이 형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 내려놓음 100 후회와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