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남 Mar 28. 2017

[소설] 내려놓음 102 신호등 앞에서Ⅱ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2 신호등 앞에서 Ⅱ





 일전에 승현이 형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승현 : 너 몸 상태 좋은 것은 아는데 벌써 운전 생각하고, 남성성 확인한답시고 야동보고 이런 멘탈 상태가 너무 안일 한 것 같다.

동완 : 저도 스스로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듭니다.

승현 : 종양은 언제는 2nd하게 증식할 수 있어. 다시 증식할 때는 종류가 바뀌기도 하고.

동완 : 약도 먹고 방사선 치료도 하는데요?

승현 : 한의사들 한약 주면 100% 다 낫더나? 똑같아.

동완 : 한의사인 내가 오히려 현대의학을 맹신하고 있나 싶네요.

승현 :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과 상태에 대해 신경 쓰고 좋은 것만 먹고 욕심을 내도 모자랄 판에 말이야. 성상세포종은 혈관이 많아서 아무리 들어내려도 다 못해.

동완 : 반성되네요. 안 그래도 혈관 많아서 수술이 힘들 거라고 동의서 쓸 때 부모님께 이야기했었다고 하더라구요. 이론상 가능한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들어냈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래도 한계가 있겠죠?

승현 : 오히려 안일하게 탱자탱자하는 멘탈이 편할 것 같아서 그냥 좀 보고만 있었던 것도 있는데 오전에 니가 하는 말들이 하루 종일 마음에 걸린다.

동완 : 제가 증상이 너무 없어서 그런가...

승현 : 이건 니 병을 대하는 본인의 입장이 아닌 거 같다. 조심해야 해. 절대 무리하면 안 돼. 항암 치료 중에 감기라도 한 번 걸려서 열만 나도 모든 게 다 꼬이고 리셋이야. 조심해.

동완 : 중병에 걸렸다는 자각이 매우 없기는 해요.

승현 : 증상은 지금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어. 증상 없을 때 조심하고 치료 잘 받고 안 좋은 것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지내야지. 나타나기 시작하면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게 종양이야.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과 병의 진행 및 예후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으므로, 지금 드러나는 증상이 없다고 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게 형이 말하고자 한 바였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한의사들 한약 주면 100% 다 낫더나? 똑같아.’는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 말은 곧 치료법이나 수단보다는 환자의 감수성(感受性 susceptibility)이 더 중요한 관건이라는 말과 같았으니까.



 30년 넘게 담배를 피워도 무병장수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연기(煙氣)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도 폐암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최선의 의료를 받지만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다. 이는 소인(素因)감수성(感受性)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며, 이 둘은 무작위적으로 나타나고 인간의 통제 밖에 존재한다. 한마디로 운명이 무심코 던진 주사위에 ‘나을지 못 나을지 또는 쉽게 나을지 어렵게 나을지’와 같은 나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엿 같은 상황인가.


소인(素因)

질병에 걸리기 쉬운 경향을 지닌 개체의 상태

예를 들면 같은 환경에서 같은 병원체의 침입을 받아도 병에 걸리는 사람과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고, 만일 그 병에 걸려도 가벼운 사람과 중한 사람이 있는 것은, 소인의 개인차에 의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편적 소인은 생리적 소인이라고도 하며 매우 큰 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인으로 연령/성별/인종 등이 있고, 이에 반해 개인적 소인은 병적 소인이라고도 하며, 유전이나 특이체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감수성(感受性 susceptibility)

외계의 자극이나 인상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능력.
치료에 대한 생체반응의 속도, 크기에도 사용되며, 감염원에 대한 피감염성에도 사용된다.


 이처럼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딸이자 아동정신분석의 선구자로서 명성이 높은 ‘안나 프로이트’가 제시한 개념인 ‘방어기제’. 이 방어기제에는 투사, 왜곡, 행동화, 퇴행, 신체화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나의 경우와 같이 엿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주로 발동하는 방어기제에는 부정, 차단, 정신분열적 공상, 억압, 억제가 있다.


 부정(denial)은 의식적으로 참을 수 없는 생각이나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한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차단(blocking)은 감정이나 생각, 충동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정신분열적 공상(schizoid fantasy)은 갈등해결이나 만족을 위해 현실에서 벗어나 자폐적인 후퇴를 하고 공상을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억압(repression)억제(suppression)는 비슷한 양상을 띤다. 잊고 싶은 기억이나 생각. 용납되지 않는 욕구를 피하려는 방어기제로써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면 억압, 의식적으로 일어나면 억제이다.


 물론 방어기제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앞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다, 나와는 먼 이야기이지만. 나는 대부분의 불안을 억압하고 억제하며 지냈다. 심하다 싶으면 EFT도 사용하고 글을 쓰거나 친한 사람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씩은 이어폰으로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자전거를 돌리기도 했다. 이대로 마구 달려 미래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MRI 판독날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을 억누르기 힘들어졌고 결국 그분을 다시 찾았다. 슬쩍 성당 구경 한 번 가본 게 끝인 주제에 신자 흉내를 내며 성호경 비슷하게 긋고는 기도했다, 성당에 교리 교육도 신청했으니 어여삐 여겨주실 거라 여기며.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당신의 뜻이라 저는 믿습니다. 어떠한 가르침을 저에게 주시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감사히 여기려 합니다. 하지만 저를 너무 신뢰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나약한 존재라 크나큰 시련 앞에서는 큰 깨달음보다는 절망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좀 더 견디기 쉬운 방법으로 길을 가르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라옵니다.’


 이렇게 불안한 마음을 그분께 잠시 의탁하니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이를 천주교에서는 순명(順命)이라 하던가? 왜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는지를 느끼며 성당에 교리반 신청한 나의 선택에 만족했다. 믿음의 이유가 단지 현실도피와 불안함 해소라는 점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운명의 날이 임박할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나가 그분께 드리고도 넘쳐났고 그 잉여분은 내 마음을 서서히 잠식해나갔다.


순명(順命, obedience , oboedientia)

복음적 권고의 하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자유 의지를 가지고 기쁨으로 명령에 따르는 덕을 뜻한다.



 나에게는 책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걸 메모해두는 공책이 있었다. 꺼냈다. 수술을 앞두고 암울했던 그때, 나는 위안 받기 위해 시(詩)를 떠올렸었다. 지금 내 영혼도 그때처럼 흔들리고 있다. 뿌리를 북돋아줄 시비(施肥)가 필요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한 구절. 패망을 앞둔 일제의 마지막 발악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징용이니 징병이니 정신대니 무차별적으로 끌려가던 시대상황과 오빠의 결혼을 두고 벌어지는 여러 걱정 속에 붕 떠버린 가정, 그리고 그녀에게 급작스레 찾아온 병.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그녀는 자신의 고향 개성 박적골에 내쫓기듯 요양 오게 된다. 그렇게 요양 생활을 하던 중 은방울꽃 군생지를 발견한 그녀는 이야기한다.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미화됐던 은방울꽃의 실체를 발견한 날은 온종일 이상하게 우울하고 마음이 아팠다.

 장차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는 어찌 될 것인가.

 내가 지금 이 상태에 완벽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이 상태가 영속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막연하게지만 자연과 행복하게 일치된 것 같은 자신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중요한 일부를 서울에 남겨 놓고 온 것처럼 느꼈다.



 날아와 꽂힌다. 마치 이미 매설해두었던 지뢰를 건드린 것처럼 가슴에서 폭발한다. 빗대어 생각한다.


 ‘장차 나는 어찌될 것인가. 내가 지금 이 상태에 완벽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이 상태가 영속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막연하게지만 모든 것이 좋다며 청신호만 보내는 자신의 몸을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중요한 일부는 1주일 전 병원에 놓고 온 것처럼 느끼고 있다. 빨리 가서 가져와야 난 온전해 질 수 있다.’



 걱정한다 하여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음을 알면서도 불안은 여전히 나를 지배했다. 이미 몸이 보내는 긍정적인 메시지에 큰 희망을 품었다가, 악성이라는 결과로 뒤통수 맞았던 나였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상황이 마냥 좋게 보이지 않았고 급기야 지금까지 내 몸이 보내온 청신호와 그에 따라 나에게 깃든 긍정 마인드는 다가올 충격적인 결과에 휘청 되지 않도록 하는 운명의 따뜻한 배려가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생각이 뻗쳤다.



 그렇게 운명의 날은 앞둔 밤, 잠을 설쳤다. Temodal 휴약기를 가진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 내려놓음 101 신호등 앞에서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