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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남 Mar 28. 2017

[소설] 내려놓음 103 신호등, 켜지다.Ⅰ

20대 한의사, 암에 걸리다.



103 신호등, 켜지다.Ⅰ





 24시간 일들이 터지는 병원이지만, 그래도 하루의 시작이라는 게 있다면 병원은 그 시간이 일반 가정에 비해 훨씬 이르다. 새벽 5시가 되면, 입원 환자들의 바이탈을 체크하기 위해 간호사들이 병실을 오가기 시작하고, 6시쯤이 되면 꺼져있던 복도의 불이 켜짐과 동시에 간호사실에는 나이트와 데이 근무를 교대하느라 2배로 늘어난 간호사들로 북적거린다. 쪽잠을 자고 일어난 전공의들도 그 사이에서 열심히 인수인계를 받느라 정신없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병원 신세 질 일이 많은 법 아니겠는가. 입원 환자의 대부분은 노인이고 그 분들에게 6시 즈음은 하루를 시작하기에 늦으면 늦었지 이른 시간이 아니다. 이미 일어나서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잠시 산책도 다녀오고, 씻기도 하고 엄청 바쁘다. 그 분들이 하루 동안 쓰는 에너지의 절반이 이 시간대에 소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빠른 패턴에 따라가려면 일찍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6시 반에 일어나 재빨리 나갈 준비를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원래였으면 출근했어야 할 어머니였으나, 곧 들을 검사결과가 엄청 중요해서 같이 동행했다. 그러다보니 동생을 제외한 온가족이 식사하랴 샤워하랴 옷 입으랴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혼이 나갈 듯 바빴던 1시간 끝에 찾아온 고요함. 잠시 숨죽이고 있던 불안이 나를 다시 집어삼켰다. 한 번 쏟아져 나오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입을 다물게 한다. 뒷자리에 앉아 차창 밖으로 흐르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도 운전하고 싶다. 차 몰고 출근하고, 진료하고, 퇴근하고, 다른 사람처럼 세상의 일부이고 싶다, 구경꾼 말고. 이렇게 아름답고 활기찬 세상에서 내 자리는 어디일까?’


 룸미러로 힐끔힐끔 나를 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선이 느껴진다. 자식 눈치나 보는 부모님을 만든 나 자신이 한심스럽고 죄스러울 뿐이지만 그 마음도 잠시, 일진에게 돈 뺏기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아이의 존재감처럼 이내 옅어져 갔다.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7시 50분쯤. 생각보다 길이 덜 막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외채채혈실이 있는 데레사관 1층으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본 채혈실 앞 풍경은 장관이었다.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 무색할 만큼 도떼기시장 마냥 부산스러웠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환자가 많다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프고 있다는 건지, 이런데도 잘 굴러가는 세상이 신기했다.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1시간을 기다려 접수하고, 또 기다렸다가 혈액검사받고, 신경외과 외래로 자리를 옮겼다. 앞으로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침처럼 해야 할 일이 많으면 어버버버 시간이 금방 지나갈 텐데, 병원에서 허락된 건 오직 기다림뿐이다. 달리 내가 기다림의 성(城)이라 표현했을까? 그저 폰 게임이 시간을 잡아먹어주기를 기대하며 말없이 손가락을 놀려본다. 효과는 그럭저럭 있어 시간이 전보다는 조금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고 있던 나의 곁에 화장실에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앉으셨다. 어머니는 긴장하시면 화장실에 가는 버릇이 있었다. 예의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또 말썽을 부린 게 분명했다. 굳이 세세히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어머니의 얼굴은 긴장과 걱정, 불안으로 굳어 있었다. 의자에 앉으신 어머니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셨다. 그리고 품안에서 염주를 꺼내 꼭 쥐고 한 칸 한 칸 돌리기 시작했다. 꾸준히 시주하긴 해도 직접 절에 찾아가는 일이 드문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간절함이 묻어나왔고 나에게로도 전해졌다. 못난 자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숭고했다. 그만 외면해버렸다. 같이 기도라도 드려야 할까, 아니면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몰라 그저 폰만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오래가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아무리 눈이 좁디좁은 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한 들, 마음이 그 곳을 향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나도는데 게임이 제대로 될 리가 있을까. 갈 곳을 잃은 손은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고, 그 안에는 며칠 전 넣어두고는 꺼내는 것을 잊어버린 메모지 몇 장과 필통이 들어있었다.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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